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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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비밀리에 받는 미국의 상 문화

2024-06-03 (월)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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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만 오면 미국의 생활은 일시 정지상태로 돌입한다. 미국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심지어 내가 아이들과 남편이 있는 가정주부인지도 잠시 잊고 있다면 거짓말일까? 한국에 오기 전 심은 상추와 호박 그리고 고추는 제대로 잘 자라고 있는지 정말 까마득히 먼 이야기로 어느덧 3주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 일주일 후면 이 그리운 한국을 떠나야 하는 딱 이 시점에 드디어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미국이라는 곳이 떠올려진 이유는 한 통의 메일을 받고서부터였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이슈는 30년 만에 양육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늦둥이를 낳은 불운(?)으로 남들보다 늦은 해방이기에 더욱 뜻깊었던 이유인데 결혼을 하고 아이들 낳고 기르고 했던 시간이 어느덧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드디어 막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이 시점, 그러니까 만으로 18세가 되는 해까지 엄마의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물론 대학을 가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고 앞으로 더 많은 일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익히 보고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대학생 이후의 삶은 일단 부모의 책임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관문은 성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해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심어 주어야 한다.


말이 길어지는데 중요한 메일 이야기를 해야겠다. 고등학교에서 온 메일인데 졸업식 전에 상을 받을 예정이니 언제까지 그리고 몇 시까지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자리가 많지 않으니 부모님 이외에 형제자매가 온다면 미리 알려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보통 졸업식 날 모든 졸업생 앞에서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상을 받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한국문화를 35년 겪어온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사다.
미리 상을 받은 며칠 후 성대한 고등학교 졸업식은 마치 대학교 졸업처럼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는다. 학교마다 매년 졸업가운의 색깔이 달라지면서 졸업 연도를 기억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졸업식은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기품으로 시작되고 밴드의 우렁찬 기운으로 졸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함께한 가족은 그들의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졸업을 기뻐하며 축하해 준다.

이때 개인적인 시상은 빠져있다. 우수한 아이들은 졸업 전에 상을 받고 이미 가족의 축하를 받아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상을 받으러 오라는 메일을 며칠 전에 받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상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한국처럼 학교장상부터 교육감상뿐만 아니라 각 과목 우수상 그리고 깨알 같은 클럽 상이라던지 각종 상을 고루 나누어 준다. 특히 기부금 같은 돈으로 받는 스칼라스틱 상은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을 갖게 되는 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음식점이나 보험회사, 각종 단체 등 개인이 주는 장학금을 잘 이용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그 결과는 돈으로 직결된다. 적은 금액에서 큰 금액까지 어떤 기관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신청하고 그에 맞는 에세이나 인터뷰 후 선정이 되면 대학 등록금에 보탬이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졸업하면서 쓰이는 돈을 충당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즉 부지런하게 손을 놀리면 장학금과 직결될 수 있는 찬스가 바로 고등학교 졸업이다.

상이란 누군가에겐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이 되고 상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반대급부인 낙오자가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도 분명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데 이는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비교된 교육이 아닌 개인의 장점을 살려 나만이 잘할 수 있는 장점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남 앞에서가 아닌 자신의 잣대에서 성실하게 무언가를 해냈다는 조용한 보상은 그들의 자신감을 위해 대단히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미국의 조용한 상 문화는 비단 학생들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상에 대한 기대치가 낮게 만드는 문화가 그대로 이어져 상뿐만 아니라 기부하는 문화 또한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누가 누가 더 조용히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를 경쟁이나 하듯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그들의 만행(?)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번엔 참석하지 못하지만,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상 시상식에 자리 하나를 양보한다는 의미에서 미안함을 대신해야겠다. 상추가 많이 자랐으려나? 이제야 정신이 조금씩 고개를 드는 걸 보면 곧 한국을 떠나야 함을 알리는 신호가 되는듯하다. 그냥 한국에 머물러 싶지만, 쉿!! 내 땅에서 살지 못하는 이민자의 아픔 또한 비밀에 부쳐야겠다.

<김지나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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