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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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생각

2024-05-12 (일) 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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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1절… 생략,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불 제 나는 좋데나…2절

해마다 봄이 오면 귓가에 맴도는 노래, 김동환 시인이 지은 시를 음미하며 두고온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한 그리움이 봄향기처럼 밀려온다.

미국에 산지 수십년이 지났어도 역시 나의 고향은 나를 길러준 한국이다. 1절도 좋지만, 2절이 더 마음에 닿는 건 봄마다 파랗게 펼쳐지는 하늘, 한 점 연두빛이 초록잎으로 싱그럽게 퍼져가는 물결, 춤추는 나비들, 청아한 목소리로 마을을 깨우는 종달새, 따스한 고향을 찾아온 제비, 높고 청명한 하늘을 제 집 삼아 빙빙 돌고있는 매, 독수리등 자연의 생동감이 온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일까.


마음은 벌써 봄바람타고 고향에 가 있다. 어려서 오가던 학교 언덕길, 또래 아이들과 신나게 타던 썰매장, 땀을 줄줄 흘리며 끼어앉아 공짜로 즐기던 쾌쾌한 만화가게, 가족과 함께 했던 대천 해수욕장, 친구들과 수다떨며 고운 낙엽주워 책갈피를 채우던 경복궁 돌담길, 일등을 목표로 목청 다해 부르던 학교대항 합창경연대회,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즐겁기만 했던 스케이트장, 어설픈 데이트하며 걷던 등산길, 펑펑 나리는 눈 속에서 길을 잃었던 북한산길, 그리고 하얀 겨울.

이른 아침 숲길에는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를 주는 봄꽃들의 향연이 놀랍다. 유난히 흰색이 많다. 순결하고 고상하게 피어나 봄을 알리던 하얀 벚꽃이 지나간 자리에 ‘사랑의 기쁨’인 아젤리아가 피고 향기로운 앨리섬 꽃, 캐잎 자스민, 하얀 후린지, 백합, 잎없이 도도하게 피어난 하얀 목련, 스노우 화잇등 그 아름다움에 새삼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활짝 피어난 더그우드의 햐얀 꽃잎 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보석보다 더 눈부시다. 하얀 베일을 쓴 웨딩드레스의 순결한 신부가 보인다. 하얀색이 더욱 마음을 끄는건 백의민족인 한국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한 건 아득한 옛날부터 흰옷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나라는 검정옷을 숭상하고 일본은 청색을 숭상했다는데,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이 1898년에 출간한 조선 민족에 관한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그녀는 “남산에 올라 흰눈더미 같은 걸 보았는데 그것은 하얀 두루마리의 물결이었다” 고 회고했다. 기원전 1세기 쓴 진서의 <삼국지>에도 “흰색 의복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보포와 바지를 입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흰옷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여전히 사랑받고 즐겨 입었다. 그 이유는 흰색이 주는 포용성과 자연과 통하는 순백의 지조, 진실, 순결, 장수, 만물의 근원인 시초의 상징성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염색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염색이 발달되지 않은 점도 있었겠지만 흰 옷은 빨기만 하면 청결하고 깔끔해져 경제적이고 실용적이었다. 학교 실험실이나,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의 하얀 까운을 보면 흰색이 주는 청결함과 신성함, 위엄, 절제와 검소, 지고의 아름다움을 담은 완벽함이 느껴진다.

차분히 내리는 봄비가 마음을 적신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출렁이던 강물도 마음속을 흐르는 추억의 강이 되어 소리없이 고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언젠가 한국의 전통의식, 상여의식을 본 적이 있다. 한 생명을 존중하여 짚신을 신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넋을 위로하고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길을 밝혀주는 상여객들의 하얀 옷에서 경건함과 미덕이 묻어나고 있었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하는 길,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날에는 이상과 현실의 조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원초적인 색, 성스러운 하얀 옷을 입은 자녀들 앞에서 ‘후회없는 삶이었다’ 할 수 있는 결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상상의 나래를 편다, 만물이 하얀 웃음으로 찾아오는 봄, 남촌의 꿈을 꾸고 있다.

<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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