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담한 산성 오르니…봄빛 들판과 ‘이순신의 바다’

2024-03-22 (금) 남해=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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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관음포-대국산성-임진성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노량’은 ‘죽음의 바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지만, 한국인의 가슴에 ‘불멸의 영웅’으로 살아남았다. 임진년 이래 7년간이나 외세에 유린당한 나라도 1598년 겨울을 지나고 새봄을 되찾았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남해 앞바다는 봄이 되면 그 어느 곳보다 생기가 넘친다. 이순신의 마지막 바다에 쪽빛, 봄빛이 넘실거린다.

■기품 있지만 무겁지 않은… 관음포 이순신바다공원

하동과 남해 사이에는 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1973년 개통한 남해대교 바로 옆에 2018년 완공한 노량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다. 현재 남해대교는 보수 공사 중이라 통행이 막혀 있고 모든 차량은 노량대교를 지나 남해로 들어간다.


남해읍내까지 이어지는 4차선 국도변 곳곳에 ‘이순신바다공원’ 이정표가 보인다. 범위를 좁혀 보면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은 곳은 노량해협이 아니라 남해 설천면 서쪽 관음포 앞바다다. 그의 유해가 처음 육지에 발을 디딘 곳은 ‘관음포유적’ 혹은 ‘이순신순국공원’으로 불리다 최근 ‘이순신바다공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부산에서 해남까지 어느 한 곳 이순신의 바다가 아닌 곳이 있을까마는 공교롭게도 그 한가운데서 최후를 맞았으니 그의 전공을 기리는 명칭으로 적절해 보인다.

노량해전은 퇴각하려는 왜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선조 31년(1598) 음력 11월 18일부터 19일 사이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연합함대가 왜군과 벌인 바다에서의 마지막 전투다. 1597년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왜군은 육전에서도 고전했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원군과 함께 고니시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했고, 진린은 요청을 받아들여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알렸다.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진형을 재정비했다. 11월 18일 밤 예견대로 노량해협 주변에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했고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이날 밤 전투에서 왜의 선박 200여 척이 불타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아군에 나포됐다.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던 19일 오전,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바다공원에는 바다로 길쭉하게 삐져나온 지형에 이순신 유적과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탐방로 초입에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장군의 유언을 새긴 비석이 크게 서 있고, 그 뒤로 이락사(李落祠)라는 작은 사당이 보인다. 이순신이 전사한 지 234년이 지난 1832년, 장군의 8대손이자 통제사 이항권이 유허비와 비각을 세운 곳이다. 비각에는 ‘대성운해(大星殞海)’ 편액이 걸려 있다. ‘큰 별이 바다에 지다’라는 의미다. 이락사 앞 약 50m 탐방로에는 밑동에서부터 가지를 벌린 육송이 좌우로 운치 있게 도열해 있다.

이락사에서 땅끝까지 약 500m 탐방로도 소나무와 동백이 어우러진 멋진 길이다. 간간이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동백나무 잎이 번들거리고 솔향과 바다 내음이 섞여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 장군의 넋을 기리는 장소인 만큼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길이다. 탐방로 끝에 2층 누각 첨망대(瞻望臺)가 세워져 있다. 이순신이 최후를 맞은 바다를 조망하는 곳이다.

■봄이 오는 마을과 바다 한눈에… 대국산성과 임진성

외침이 잦았던 남해에는 오래전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사시설이 많았다. 높고 낮은 산등성이에 아담하면서도 조망이 뛰어난 성이 여럿 있다. 설천면과 고현면 경계인 해발 376m 대국산 정상에 대국산성이 있다. 출토된 유물이나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국산성은 외성 둘레가 730m 정도로 남해군의 성곽 중 가장 크다. 바깥은 돌로 성벽을 쌓고 안쪽은 잡석과 흙으로 메웠는데, 북쪽 일부분을 제외하고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동남쪽과 북쪽 두 곳에 성문, 중앙에 건물과 연못 터가 남아 있다.

산정을 머리띠처럼 두른 성곽을 따라 걸으면 남해의 안쪽과 바깥바다를 두루 살필 수 있다. 동쪽으로는 통영과 사천, 북쪽으로 하동, 서쪽으로 여수와 광양 앞바다가 시시각각 풍경을 달리하며 따라온다. 특히 동쪽 능선에서 바로 아래에 보이는 진목마을과 강진만 풍광이 일품이다. 지붕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집들이 해안가에 옹기종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주변에 포진한 농지는 푸릇푸릇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다. 남해 특산물인 마늘과 시금치가 자라기 때문이다. 쪽빛 바다에 둘러싸인 남해 들판엔 사실상 겨울이 없다.

대국산성까지는 진목마을과 정태마을에서 등산로가 연결돼 있다. 2~3km 정도에 불과하지만 제법 가파르다. 아직까지 방문객이 많지 않아 여행객은 대부분 임도로 차를 몰아 산성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다. 시멘트 포장이 돼 있지만 좁고 가파른 길이니 운전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남면에 위치한 임진성은 대국산성의 축소판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해발 108m 낮은 봉우리에 관군과 백성이 힘을 합쳐 쌓았다 하여 민보성(民堡城)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실제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성벽을 쌓고 안쪽을 잡석과 흙으로 채운 모양은 대국산성과 비슷하다. 둘레 286m 성 안에는 현재 계단식으로 쌓은 원형의 우물 터만 남아 있다. 성벽 서쪽으로 이동하면 구미마을과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전쟁에 대비한 시설이라는 게 무색하게 아늑하고 평화롭다.

바닷가 마을을 잇는 걷기여행길 ‘남해바래길’이 마을에서 2.5km 떨어진 임진성까지 연결된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구미마을이 특히 아름다운 건 해변에 조성한 방풍림 덕분이다. 느티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등 360여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수령이 500년 정도 됐다고 한다.

<남해=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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