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는 삶은 말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서로에게 사랑과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를 주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품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말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말에 관한 금언(金言)과 고사(故事)는 항상 말조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말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할 틈을 가져라.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할 가치가 있는지 무익한 얘기인지 누군가를 해칠 염려는 없는지 어떤지를 잘 생각해 보라”는 톨스토이의 조언은 우리가 말하기 전에 한 번쯤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다.
지난해 연말 테니스 동호회 총회 겸 신임 회장 취임 축하 모임에 갔을 때 일이다.
모임 본래의 취지에 따라 덕담을 주고받으며 행사가 이어지면서 신임 회장으로 선임된 분이 간단하게 취임 인사를 한 후에 동호회 운영에 관한 포부를 발표하고는 느닷없이 내게 “한 말씀”해 달라는 청을 했다.
신임 회장은 내가 연장자라는 점을 고려해서 청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아 잠시 머뭇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너무 거절하기도 민망하고 해서 일단 예의를 갖추느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고 특별히 주제를 지정해 준 것도 아니었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인데다가 신임 회장이 동호회 운영에 관한 포부를 말씀한 후여서 분위기에 맞게 간단하게 한마디를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한 말씀”을 하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기다리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회원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지난 일 년간 경험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도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으니 웬만하면 한 번 썼던 공이라도 잘 간수했다가 다음에 연습 공으로라도 한 번 더 쓰도록 아껴 쓰자”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좌중을 둘러보는 순간 예상외로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망년회 겸 신임 회장 취임식이라고 들떠 있던 회원들의 기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표정들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으면 재치 있게 멋진 말로 덕담이나 하고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낙숫물은 떨어지던 데 또 떨어진다”는 속담처럼 한번 버릇이 들면 고치기 어렵듯이 “왜 아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과 예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으니 당시 분위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 미국 땅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국에서 5, 60년대에 궁핍하게 살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던 “아껴 써야 한다.”는 말을 들먹인 것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이들에게 듣도 보도 못한 중국 철학자가 한 말까지 들먹이면서 “버리지 말고 한 번 더 쓰자”고 했으니 “그 말씀이 왜 거기서 나와” 하고 의아해했을 테고 그러지 않아도 썰렁해지고 있는 모임의 분위기에 부채질을 한 셈이니 뒷감당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필요한 때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상황을 표현하거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 본래의 뜻이 그대로 전달 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말할 가치가 있는지. 무익한 이야기인지” 등을 생각하지 못하고 대책도 없이 “한 말씀”을 하란다고 덥석 받아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했으니 나 스스로가 젊은 회원들이 보는 앞에서 꼰대의 본(本)을 보인 셈이 되었다.
우리는 주로 말로 상대방과 의사소통하면서 살아간다. 말은 즉흥적이고 편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번 나온 말은 지울 수가 없다는 속성과 함께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통해서 인격은 물론 가정교육의 정도나 교육 환경까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 때문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는 스스로 “꼰대”가 되어 가는 줄도 모르게 “순 진짜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귀한 모임이 되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중에서 오늘 저녁 모임을 회상해 보면서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는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은 무명씨의 심정이 왜 내 마음에 와닿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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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수필가,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