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도 냉장고도 라디오도 세탁기도 세척기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건강 보험도 웰페어도 없어 병에 걸리면 약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흉년이 들면 굶어죽어야 하는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참정권이니 하는 단어를 들어보지도 못한 세상, 그런 세상이 불과 100여년 전 한반도에 존재했다.
그런 곳에서 1875년 이승만은 태어났다. 몰락한 왕가의 후손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20살인 1895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양 학문과 기독교에 대해 알게 되고 일제의 지배에 반대하며 민중 계몽 활동에 앞장섰으나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탈옥하나 다시 잡혀 곤장 100대와 종신형에 처해지며 그 후 5년 7개월 동안 한성 감옥에 갇힌다.
1904년 특별 사면을 받아 옥에서 풀려난 그는 이번에는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협조를 약속받았으나 미국은 이미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상태였다. 훗날 미국의 배신을 알게 된 이승만은 죽을 때까지 미국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후 조지 워싱턴과 하버드, 프린스턴에서 수학하며 한국인으로 처음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40년 가까이 미국에 머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가 뛰어난 선각자며 독립 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당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상해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91.8%로 6.7%를 얻은 김구를 압도한 것은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 대다수 한국인이 기억하는 이승만은 남북 분단을 고착화하고 친일파를 등용했으며 4.3 사태 때는 수많은 민간인을 죽였고 6.25때는 한강 다리를 끊고 제일 먼저 도망갔으며 장기 집권하다 4.19로 물러난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가 권좌에서 내려온 지 60년이 넘었지만 그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굳히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으로 11년 전 나온 ‘백년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00년을 친일 모리배와 독립 투사들과의 전쟁으로 보는 이 작품은 이승만을 하와이 갱단 두목과 플레이보이로 그리고 있다. 그런 인물을 어떻게 독립 운동가들과 대한민국 국민이 초대 대통령으로 뽑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최근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로는 드물게100만 돌파가 예상되는 ‘건국 전쟁’은 이 작품에 대한 답변서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길위에 김대중’ 12만, ‘그대가 조국’ 33만, ‘문재인입니다’ 11만에 비하면 엄청난 성적이다. LA에서도 하루 3번씩 상영하는데도 거의 찰 정도로 인기다.
이 작품에는 한국인들이 잘 몰랐던 이승만에 관한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그 중 몇가지만 들면 북한은 이미 1946년 소련의 지시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독자적인 국가 체계를 갖춰가고 있었고 남북한 초대 내각 명단을 보면 북한에 친일파가 더 많았으며 4.3 사태 때 민간인 피해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좌익 세력이 경찰을 공격하고 민간인으로 위장해 보복을 유도했기 때문이고 이승만이 민간인이 피난가는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민간인 희생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지 개혁과 한미상호 방위 조약이라는 업적이다. 건국 초기 대한민국 국민의 70%는 농민이었고 그 중 80%는 소작농이었다. 이승만은 이것을 자신의 지지 계급인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작농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들을 자작농으로 만들었다. 내려가기만 하면 남한 사람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라던 박헌영 말과 달리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들은 공산화에 저항했고 이것이 남침이 실패한 주 요인의 하나이다. 농지 개혁 성공으로 토지 자본이 산업 자본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또 이승만은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강수를 두며 미국을 압박해 한미 방위 조약을 체결, 한국의 안보를 지켰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6.25 이후 70년의 긴 평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가 예산의 20%를 교육에 투자해 문맹을 없애고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그 결과 자신이 권좌에서 쫓겨나기도 했지만 4.19 때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 “불의를 보고 일어나는 학생들이 있는 나라의 앞날은 밝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가 저지른 과오도 많지만 그를 평가할 때 봉건 잔재와 일제의 수탈, 북한의 위협 등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와 상황을 감안하는 것이 옳다. 이 영화가 이승만에 대한 균형 감각을 잡아 주는데 일조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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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