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고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키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며…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의 진행을 기하기 불능하고…”
이 글은 1925년 3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면서 공고 제 42호를 통하여 밝힌 포고문이다. 그는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되어서도 ‘국민이 원하여’ 하야했으나 기실 탄핵이었다. 그는 두 번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되어 세계사적으로도 예를 찾기 힘든 불명예를 안게 됐다.
우리 세대는 정부에서 만든 국정교과서와 일제 사범학교 출신 교사들로 부터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특히 김원봉, 조소앙, 여운형, 양세봉, 홍명희 등 좌익노선에 관심을 가졌거나, 심지어 이승만과 노선을 달리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책에서 거의 지워져 버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 맨 앞 줄에 박용만이 있다.
우성 박용만은 1881년에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고, 14세에 그의 인생항로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삼촌 박희병을 따라 일본유학을 떠나 정치학을 배운다. 유학도중 개화파 박영효가 이끄는 활빈당에 가입한 일로 귀국후 투옥된다. 출옥후에는 감리교에 소속, 애국단체 상동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던 중 일제와 을사오적의 황무지 개척권에 반대하다 또 한 차례 투옥되는데, 이때 옥중에서 이승만을 만난다.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까지 맺었지만 박용만의 성장과정과 일본과 미국을 거치며 공부하고 구상하고 실천했던 무장투쟁사를 들여다 보면, 공교롭게 그 대척점에 이승만이 있어 놀라게 된다. 즉, 이승만은 외교력을 키워 이를 바탕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박용만은 무력항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꿈꾸게 된다.
해외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상동감리교회의 상동청년회는 이승만, 박용만 등을 미국으로, 이동녕, 이상설 등을 연길용정으로, 우덕순 등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낸다. 1905년의 일이었다.
박용만은 24세가 된 1905년 2월 삼촌 박희병, 이승만 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도착했으며, 학업과 취업을 위해 네브라스카 커니시에 자리 잡았지만, 그 해 11월 콜로라도 덴버로 이주하였다. 삼촌 박희병이 병사한 1907년에는 한인단체 통합을 목표로 애국동지대표회를 조직한다.
마침내 1907년 7월, 네브라스카 주 정부로 부터 군사학교 설립안이 통과되어 2년의 준비끝에 1909년 커니시에 ‘소년병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학교운영을 위해 네브라스카 거주 한인들이 1년에 3불(현재가치 약 100불)씩을 기부하였고, 박용만도 직접 각 지역을 순회하여 모금활동을 했다.
첫 입학생은 모두 13명으로, 10대가 4명이 포함됐으며 이 중에는 후일 유한양행을 설립한 15세의 유일한도 있었다. 교관으로는 구한말 군인출신 유학생 김장호, 최익현의 문하생 김현구, 한학자 박장순, 교장 박용만 등 8명이었다. 학생 수는 이후 매년 30명 내지 40명 선으로 증가한다.
커리큘럼은 도수, 집총, 편제, 사격, 전법 등 병학을 중심으로, 국어한문, 영어일어, 수학, 이과학, 역사, 성서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계 학기로 운영됐으며, 이역만리 미국땅에서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불굴의 기세로 청년들은 낮에 일을 하고 늦은 오후부터 강행군을 이겨 나갔다.
1910년, 소년병학교는 미국 장로교단의 선교차원의 도움과 독지가 존슨씨의 도움을 받아 헤이스팅스 대학으로 이전하였고, 1914년 일본의 끈질긴 방해공작으로 문을 닫기까지 6년간 약 170명이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이들은 중국, 러시아, 만주, 국내 등지로 흩어져 각양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같은 해에 애국동지대표회를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고, 신한민보의 최정익, 문양목 등과 등과 함께 일제에 투항한 순종왕을 부정하고 국민국가 건설을 주 내용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한다. ‘무형국가론’을 내세워 공화주의, 민주주의 국가를 천명하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당시 ‘대한민국’이 태동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또한 1912년에는 각 국에 흩어진 독립운동을 한데 아우르는 노력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한다.
이후 박용만은 하와이로 활동무대를 옮기는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7천명이 박용만과 이승만을 함께 초청한 것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은 주정부로 부터 자치정부의 경찰권을 확보하고, 하와이 지방총회 이름으로 국민보를 발행하는 등 독립운동을 체계화해 간다.
이듬 해인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 및 사관학교를 창설하였는데, 농장주였던 지사 박종수로 부터 군단부지를 희사받고, 박용만 자신도 새우젓, 베적삼 등을 수입판매하여 예산을 확보하였다. 교재로는 박용만이 적접 쓴 군인수지와 조선말독본(상하)을 포함 28종을 사용하였고, 학생 수는 약 300명에 달했다. 당시의 커리큘럼과 교재 등은 후일 신흥무관학교 설치운영에 도움이 되었고, 각처의 항일 무장투쟁을 선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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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렬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DC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