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카톡방의 글에서 미국의 19세기 사상가 Henry David Thoreau(1817-1863)에 대한 흥미로운 글과 함께 스스로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 글을 맺었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의 보스턴 지역을 포함해 뉴잉글랜드 지역은 기후가 척박함에도 미국의 많은(600여명 추산한다고) 유명한 시인, 문학인, 사상가들을 배출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기후는 척박하다 해도 산세가 훌륭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필자의 일화 하나를 털어놓을까 한다.
학교 시험 보는 날엔 필자는 기분이 좋은 편보다 언짢고 짜증, 좀 비틀린 듯한, 야단이라도 맞았으면 하는 분위기가 더 좋다. 그럴 땐 틀림없이 긴장하여 시험을 대개는 잘 치른다. 독자들께선, “원 별 습관도 다 있네” 하실 줄로 믿는다. 허나 사실이 그런데야 할 말이 없을 줄 안다. 역경을 일부러 창조(?) 하려 했었던 무의식의 발동(?)이 아니었나 싶다.
나무들을 볼 것 같으면 비옥한 토지에서 자란, 높이 휨이 없이 자란 나무들은 뿌리가 그리 깊이 자라지 않아도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지 짧다. 하여 심한 바람엔 영락없이 잘 쓰러져 밑동을 보면 의외로 뿌리가 짧은 것을 독자들께서도 경험하셨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첩첩산중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들을 보면 뒤틀리고 바위 사이를 뚫고 땅이라고도 할 수 없는 흙속에 들어가 사생결단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며 몇 백년, 아니 그 이상의 연륜으로 살아남아온 나무들 뿌리는 길고도, 단단하고, 억세 그 모진 바람과 엄동설한에도 살아남은 것이 아닌가.
남가주는 날씨로 따지면 세계 방방곡곡의 날씨를 경험하셨던 선교사님들께서 넘버원으로 꼽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비교적 밝고 긍정적, 심하면 좀 낙천적이 되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카톡 작성자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면 척박한 기후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소위, ‘Thinker’들을 많이 배출했는가의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Thoreau의 조그만 오두막집을 보니 5척 단신의 몸을 뉘일 만한 침대, 나무를 떼는 벽난로 등 소박하기 그지없는 청빈한 한 수도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 법정 스님 등의 정신적 지주이셨다는 이 분을 여태껏 모르고 지난 필자가 부끄럽다.
이 분의 저술
은 미국이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그 무엇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두 갈래 길-가보지 않은 길’의 시로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가 말하였다.
지난 봄 고국 방문 시 설악산 금강굴에 오른 추억이 있다. 이곳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617년 진평왕 39년-686 신문왕 6년 입적)가 수행하셨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절해의 고도와도 같은 깊은 산골짜기의 좁디좁은 석굴 속에서 오래 수행하시는 고승을 1,300여년이 지났지만 뵌 것 같아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하나만으로도 고국방문의 귀중한 의미는 있다.
우리들 대부분의 보통 인간들에겐 그래도 물질문명의 발달과 그 혜택으로 편안한 삶을 사는 게 좋지만 정신세계를 이끄는 대 사상가, 철학자, 문학, 예술인들이 있어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삶을 세속적에서 승화된 고상한 지경으로 인도하는 게 아닌가한다.
<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