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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생각] ‘시민권자는 방랑자인가’

2023-11-22 (수)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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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자가 되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내가 미국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이 지날 수록 귀소본능이랄까 고국에 대한 향수는 짙어만 간다. 삶의 여정이 황혼길로 접어들면서 마음의 나침반은 더욱 더 집요하게 한국쪽을 가리키고 있다.

매일 한식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신문, 방송보다는 한국신문, 한국TV 뉴스를 더 많이 본다. 카톡으로 한국에 있는 친지들과 매일 실시간으로 문자나 사진을 주고받고 때로는 장시간 음성이나 영상통화로 수다를 떨기도 한다. 국제전화요금이 턱없이 비싸던 옛날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요즈음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지금 내가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미국인 신분으로 살고있지만 그것을 잊고 아직도 한국인인 양 착각하고 살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줄이 짧고 신속한 내국인 전용 심사대 앞에 서지 못하고 외국인 심사대 앞의 긴 줄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을 타려고 영주권자일 때 만들어 두었던 ‘어르신 교통카드’를 스캔했더니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개찰구 문이 철컥 닫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 남겨두고 온 은행 계좌의 데빗카드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은행에 갱신하러 갔더니 외국인은 거소증이나 출입국 관리소에서 발행하는 외국인 신분증이 없으면 기간 연장이 안된다며 거절 당했다.

답답한 마음에 커피 한 잔 하려고 커피숍에 갔더니 그 또한 스트레스였다. 아메리카노 커피를 시킨 후 밀크와 설탕을 조금 넣어달라고 했더니 종업원은 밀크도 설탕도 없다면서 고개를 살레 살레 흔들었다.

세상에... 전에는 다방에 가면 으레 설탕과 밀크를 기호에 따라 넣을 수 있도록 작은 종지에 따로 담아 내왔었는데... 설탕이 없으면 밀크만이라도 조금 넣어달라고 사정했더니 아가씨는 ‘카페라떼’라면서 꿀꿀이죽 처럼 걸쭉한 액체를 만들어 주었다. 서울에서 미국식 커피를 마시려면 설탕 봉지와 작은 우유 팩을 준비해갖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씁쓰레 웃었다.

자격지심인지 매일 카톡을 주고받던 형제들도 막상 나를 만나니 미국사람으로 생각하고 한국인 취급을 안하는 것 같아서 내심 서운했다. 그러니 미국 시민권자를 바라보는 남들의 눈길은 어떻겠는가. 조국을 버리고 미국에 간 사람이 늙으니까 의료보험과 노령연금 혜택이나 받으려고 한국에 돌아왔다고 곱지않은 시선으로 볼 것임에 틀림없다.

시민권자는 한국과 미국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방랑자인가. 이래저래 남인수의 유행가 가사가 생각나는 한국방문이었다.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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