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순례의 길을 떠났던 청교도(Puritan)들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Amsterdam)과 레이덴(Leiden)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다가 1558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자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청교도들의 입국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을 받아들여 모든 국민들이 영국 국교를 믿고 이를 따르도록 강요하였다. 결국 청교도들은 고국인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인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20년 9월 29일 승무원 6명을 비롯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101명(남 72명, 여 29명)의 영국 청교도들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당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영국 남서쪽 플리머스 항구(Plymouth Harbor)를 떠났다. 그러나 그렇게 출항한 그들의 항해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서양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며 그들은 높은 파도와 싸워야만 했고 불규칙한 비바람의 날씨, 좁은 함선에서의 갑갑한 생활, 게다가 빈약한 식량과 병고로 인해 모진 고난의 여정을 견디고 견뎌야만 했다.
그들은 약 2개월 간의 악전고투 항해 끝에 드디어 1620년 11월 9일에 신대륙 매사추세츠 케이프 카드만(Cape Cod, Massachusetts)에 감격적으로 도착하였다. 그러나 험만한 항해의 여정으로 지칠 대로 지친 영국 청교도들에게 찾아온 것은 바닥난 식량과 극심한 굶주림, 11월에 시작된 매서운 겨울의 추위 그리고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미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의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혹독한 겨울 동안 굶주림과 인디언의 습격, 괴혈병과 질병에 걸리고 이듬해 봄이 오기전까지 하루에 2, 3명씩 거의 절반이 죽어나가는 비극의 겨울을 인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떠나온 믿음으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 1590-1667)의 리더쉽하에 현재의 보스턴 인근에 자신들이 떠나왔던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기념하면서 그들이 상륙했을 때 최초로 밟았다고 전해지는 바위를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라 이름짓고 황무지땅을 열심히 개척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인디언들에 대한 습격과 분쟁은 여전했었지만 1621년 3월 봄을 맞이하면서 인디언들과 청교도들 간에 상호협력 및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후 청교도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왐파노악(Wampanoag)부족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와 밀, 토지 경작법등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청교도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부지런히 땅을 개간하며 씨를 뿌려 경작을 해나갔고 가을에는 풍요로운 수확물을 거둘 수가 있게 되었다. 이들은 첫 수확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해 칠면조를 잡아 당시 인디언 마사소이드 추장(King Massasoits)을 초청하고 큰 축제의 잔치를 열어 추수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때가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다. 그 후 1623년 매사추세츠주에서는 추수감사절을 공식 절기로 정하고 178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이를 전국적으로 지킬 것을 선포하였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1809-1966)은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며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는 미 합중국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오는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추수감사와 찬양의 날로서 구별하여 가족과 이웃들을 초청하여 지키기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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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웅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목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