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많은 신학생들과 양심적인 지성인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이름이다. 그에게는 한가지 별명이 따라다녔다. ‘현대 신학의 양심' 바로 그것이 본회퍼의 별명이었다.
1939년 본회퍼는 미국에 유학을 왔다가 고국의 전쟁소식을 듣고 주위의 강권을 물리치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경건의 명분 아래 평화만 부르짖을 수 없음을 느낀 그는 히틀러에 정면으로 대항할 것을 결심했다. 1941년 베를린에서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치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핸들을 빼앗아 더 큰 비극을 막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는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 추이를 지켜보며 주변국가로 확전이 되지않기를 바라며 불안과 초조,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각별한 분별력과 행동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과 갈등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대하여 보여온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로 성전론(Holy War) 즉, 선과 악의 대립이다. 이것은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악한 세력으로 보고 그 어떠한 협상도 거부한 채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내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무고한 시민이 살상당하고 또 다른 형태의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 일으키기에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는 평화주의론(Pacificism)이다. 이 입장은 비폭력 평화
운동만이 인명피해를 줄이고 살상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전쟁이라는 냉엄한 현실과 동떨어진 괴리감이 있다는 지적이다. 셋째는 정전론(The theory of Just War)이다. 이는 개인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한 국가의 존립이 보다 더 중요하기에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하의 전쟁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머의 오디세이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우는 오디세우스에게 사이렌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내려졌다. 하지만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가 탄 배가 항해를 시작했을 때 함께 탄 선원들은 사이렌의 노래에 빠져들어 하나씩 죽어갔다.
그때 하프의 명인 오르페우스는 자기의 하프를 들고 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이렌의 노래에 정신이 나가있던 선원들이 죽음으로 이끄는 사이렌의 달콤한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노래에 힘입어 그들이 탄 배는 사이렌이 지배하는 죽음의 바다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이야기이다.
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상실의 아픔을 가져온 반면 새로운 변화의 물결, 대중의 심금을 파고들었던 노래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03세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여가수 베라 린(Dame Vera Margaret Lynn)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로 나갈 때 그들을 떠나 보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병사들을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오 하지만 어느 화창한 날에 다시 만날 것이오” (We’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 ll meet again, some sunny day)라는 노래를 불러 전쟁의 공포에서 자유와 용기,
희망을 심어주었다.
절망의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보다 희망의 면역력을 키워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쟁의 아픔속에서도 모든 사람을 살리고 널리 울리어 퍼지는 생명의 노래를 부르자. 그리고 전쟁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더 좋은 세상(Better World)이 우리가운데 펼쳐지도록 함께 마음을 모아기도하며 사랑과 섬김의 모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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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웅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목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