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80, 과거 20년, 앞으로 20년,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생각을 해 본다면 과연 20년 후는 어떠할까?
과거 20년 사이에 내겐 무슨 일들이 있었나? 회갑을 막 지냈으며, 72세(9년 전)엔 은퇴, 그 후 2년 뒤엔(2016년) 제2의 이민이나 다름없는 대륙 횡단,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 그리고 서부생활 8년차에 접어들었다. 1973년과 2016년은 1차, 2차 이민의 해로 큰 분수령이라 자동차 윈드쉴드에 부착된 버지니아 차량국 발급 딱지 ‘2016년’이 선명히 아직도 떼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아마도 폐차될 때까지 그대로 남겨둘 심산이다.
물론 첨가한다면 자의반 타의반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과 같은 생활을 한지도 8년째, 처음엔 좀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런대로 아주 소멸한 것은 아니나 견딜만하다. 부활을 꿈 꾸어볼까, 하하!
1970년 신혼 초엔 까마득해 보이기만 했었고 가능성 여부마저 불확실했고 극히 일부만의 일일 줄로만 여겼던 “금혼(金婚)”이라는 말씀이 우리 부부에게도 안겨줬던 너그러운 해 2020년도 있었음이랴.
존경하고 사랑하던 형제, 친지, 친구, 선후배님들과의 영원한 작별들이 주를 이었으나 그 외에는 기억하기조차 힘든 소소한 일들의 연속이던 사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앞으로 20년 동안에도 이와 별 차이가 없을 성 싶다. 바라건대 큰 병 없이 짧게 아프다가 자는 듯이 이 세상을 떠남이 제일 큰 소망이겠으나, 인명은 재천,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까?
중요한 건 자식들 포함해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는 인생이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일 것이다.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건강 면에서도 빈곤해지거나 너무 병약해져서는 아니 됨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닌가!
어찌되었거나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생각해 본다. 교회 출석과 의사 방문, 식료품점, 약국 정도 드나듦은 우리 나이의 공통 생활이 아닐까한다. 언제 사이별(死離別)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아내를 비롯해 가족들과 좀 더 가까워지도록 하며 최소한 소원해지지 않도록 할 것 등이 큰 바람이 될 것이다 취미 생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될수록 많이, 자주 갖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글쓰기와 신문사에 정기적 투고(投稿), 젊었을 때 Ipod에 입력해 놓았던(갖은 장비 기기를 사다가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ipod에 좋아하던 음악을 옮겨 놓을 수 있어 신기해하며 우쭐했을 때도 있었건만 지금은 방법도 다 잊어버리고 귀찮기도 해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음악들을 헤드폰 끼고 취침 전 듣기(잠이 저절로 온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미담(남들의 자선, 봉사소식)들과 배울만한 기사들을 신문에서 보기,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이것저것 책장에서 빼어 두서없이 이곳저곳 펴보며 이 문장 저 문장을 다시 읽기도, 머리가 저절로 숙여질 정도로 인품 있는 분 만나면 최소한 대화, 더 나아가선 식사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마련하기.
요즈음은 어릴 적 친구 몇 명과 한두 달에 한번 꼴로 점심을 단둘이 혹은 부부 동반해 한다. 즐겁다. 계속하려 한다. 사지 움직일 수 있고 운전면허 박탈(?)되기 전, 아니지 그렇더라도 Uber나 Lyft 공용차 이용해서라도 이런 만남은 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하련다.
또한 해변 맨발걷기 운동을 지속할 생각이다. 나만의 고요한 시간(명상, 심호흡과 접지운동)은 천국을 맞보는 느낌. 접지운동의 이점은 시중의 항산화 보충영양제보다 자연적으로 보다 우수하다 할 수 있기에 근래 민간에서 큰 열풍이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무료 발 마사지 정도한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일들을 꾸준히 하다보면 앞으로의 20년의 세월도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리라. 그러면 다음은 모든 걸 하늘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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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의사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