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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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가을‘그 집 앞’ 노스탤지어

2023-10-10 (화)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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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의 촉감은 언제나 신비롭다. 부슬부슬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는 하릴없이 우수와 애련을 싣고 와, 남기고 간 회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까닭 없이 짜증을 일구어내는 무더운 여름철, 지리한 장마비는 줄거리 없는 잔상들만 남겨놓는다.
가을비는 왠지 오래오래 갖가지 화폭들을 온통 뇌리와 가슴 속에, 영혼 속에 길게 길게 추억의 잔영들을 그려놓는 것 같다.

어느 노래 가사다: 오늘도 비 내리는 가을 저녁을 / 외로이 이 집 앞을 지나는 마음/ 잊으려 옛날 일을 잊어버리려 /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갑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비 내리는 가을날에는, 그 언젠가 고국 땅에서 있었을 법 했던 여운이 되살아오는 탓일까, ‘그 집 앞(현제명 작곡, 이은상 작사)’을 부르곤 한다. 가을은 어떤 형태로도 밝힐 수  없는 아련한 속내를 데려오는 은근한 탄력을 지닌 계절인 것 같다.


그가 누구였던가. 떨어져 흘러가는 낙엽만 봐도 양 미간이 저려오던 시절, 한밤중 창밖에 풀벌레들 우는 소리로 알 수없는 서러움에 자아를 잃던 그런 때이었나 보다.
누구였던가. 모습조차 어렴풋한 그녀에게 막연히 호기심을 가졌던가. 이제 인생 황혼기에 들어서서 다시 그 집 앞이 환상처럼 저며 온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오! 가을 전체가 나의 것처럼 어떻게 표현할 길 없는 야릇한 흥분에 젖어온다. 가을햇빛 또한 은근히 인자한 손길처럼 정감을 안기고 우수를 씻어 내리기도 하지만 내리는 가을비를 호젓이 창밖을 내다보며 감상해 보라. 진귀한 자신만의, 역시 알 수 없는 철학의 묘미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한껏 낭만과 우수에 젖어 가을 정취에 빠져들어 내심 기고만장한다 해도 ‘가을’이 온통 내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을은 단풍의 전설을 만끽하는 모든 이들의 것이다. 가을은 해마다 시심을 지닌 이들의 영혼 속에 각양각색으로 각인시켜 놓고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한다.

워싱턴 동포사회의 원로인 영문학자 변만식은 지난 해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를 영문으로 번역해 놓았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Geese honking high in the sky afar / Whisking wind has deepened Autumn)~"
변만식 선생은 그렇게도 번역시를 자랑하며 만족해하시더니 가을이 한껏 익어가는 얼마 전 9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시민 박목월과 변만식은 지금쯤 어디에선가 “아. AIas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하고 노래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이비인후과 전문의사인 서윤석 시인은 어느 해던가 가을날 북녘 땅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워 낼 수 없는 풍광, 절경과 남북분단의 안타까움을 함께 버무려 시를 썼다.
“…(전략) 새 한 마리 훨훨 구름사이 산자락을 돌고/고개를 돌리니 화강암 명산의 입구/ 단풍이 불타는 이 계절에/ 소나무들 날카로운 손을 뻗어 줄을 섰고 / 감회와 기대와 공포가 엇갈리는 낯선 곳이네/ 녹슨 철길이 멈춘 온정리 역사(驛舍)는 비어 있고…(중략)/ 꿈속에서나 불러보는 내 노래…(하략)”

서윤석 시인은 이날(05년 10월초) 금강산 여행길에서 동문인 이영묵 포토맥 포럼 회장을 처음 만났다. 섭리가 느껴지는 절묘한 가을 인연이다.
맥클린 거주 원로 소프라노 김복희 여사(95)가 즐겨 부른 ‘산들바람’은 우리 모두가 부르는 가을철의 애창곡이다. “산들바람이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너도 가면 이 마음 어이 해~”

올해에도 뒤뜰에 무서리 내리는 가을이 오고 타국 땅에서 밝은 달을 바라보면 ‘노스탤지어’가 가슴을 울리겠지. ‘고엽(Autumn Leaves)' 샹송을 아무리 불러 봐도 고향 그리는 토속의 엘레지를 달래지는 못하리라.

그리고 ‘그 집 앞’ 가을 저녁, 불빛에 빗줄기를 세며 거닐던 그 정서, 눈물 핑도는 막연한 그리움으로 이 계절을 보낸다. 그 어떤 고백으로도 이 가을에 내 심정을 그 누가 알랴. 풍요와 결실, 알 수 없는 서러움과 어우러져 가을은 가고 있다.
(571)326-6609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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