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풀숲에 몰래 내린 이슬에 묻어오는 계절, 풋풋한 향기로 흠뻑 젖은 가을의 문턱 이다. 한여름 그토록 무서운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 말복, 입추가 지나고나니 더위가 한풀 꺾인 듯 아침, 저녁으로 서늘함이 정말 살맛나는 계절이 돌아온 것 같다. 예전과 달리 100도 훨씬 웃도는 이상기온 속에도 우리 집 텃밭에는 풍년(?)이라고 나만의 자부심으로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집 텃밭은 전적으로 남편의 취미생활 제 1호다 새벽잠이 없는 남편은 어느 새 뒷뜰 텃밭으로 행차, 시원한 물 뿌리기, 자칫 바람에 쓰러질까봐 각별히 포도넝쿨과 오이 넝쿨이 쉽게 담장을 잘 타고 올라가게 지지대를 세우는 작업에 열심이다.
새벽에 텃밭 출근은 아침 식사도 잊은 채 텃밭 지킴의 임무(?)는 끝날 줄 모르고 태양 볕에 그을린 듬직한(?) 체격은 나의 잔소리(?)에도 꿈쩍하지 않는 독불장군의 끈끈한 임무(?) 수행에 철저하다.
그래도 노년의 남편이 즐기는 취미 생활 속, 텃밭엔 키 자랑하듯 쑥쑥 커가는 부추, 작은 밭고랑을 가득 메운 싱그러운 푸르고, 붉은 상추, 풍성한 잎새 사이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민 풋고추, 알알이 붉게 물들어가는 방울토마토, 담장 넝쿨 사이사이 노란 꽃잎 속에 바쁜 꿀벌들의 몸가짐 또한 노랑나비가 하늘하늘 춤추는 춤사위 속에 길쭉길쭉한 오이가 보란 듯 선보이고 있다.
신통하게도 토마토가 한꺼번에 빨갛게 익는 것이 아니고 하나둘씩 따먹기 좋게 서서히 익어주고, 여름 내내 붉은 상추, 푸른 상추, 풋고추, 오이, 깻잎, 부추, 신선초는 풍성하지는 않지만, 우리 부부 식탁의 풍성함과 싱싱한 야채를 먹고 즐기는 수확의 기쁨과 고마움에 감사가 절로 난다.
난 유난히 벌레에 약하다. 특히나 모기가 나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텃밭으로 행차하는 날이면 사정없이 여기저기 물어대는데 그 후유증은 대단하다. 며칠에 한 번씩은 준비한 쌀뜨물과 과일 껍질들을 믹서에 갈아 만든 영양제를 들고서 텃밭으로 향하는 날은 모기가 싫어하는 향수(?)를 듬뿍 뿌리고 무장하고 나서야한다.
그래서 그런가, 영양제를 흠뻑 먹은 무화과는 옆집에서 이사 가면서 꺾어 준 무화과나무 가지 2개를 소중하게 물병에 담가 두었더니 겨울 내내 신통하게 뿌리가 생기고 4월 봄을 맞아 텃밭 한자리를 차지해 심었다. 신통하게도 점점 실하게 무화과의 형태를 고수하면서 머지않아 열매도 주렁주렁 달릴 희망 속에 감나무, 대추나무와 더불어 잘 성장하는 기특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봄철에 앙증맞게 조그마한 열매를 수없이 매달았던 감나무는 무슨 이유인지 열매를 거의 다 떨구고 가엾게도 여덟 개만 매달고 있다. 대추나무는 그나마 잔잔한 열매가 여기저기 방긋방긋 햇살을 즐기고 있는 반면, 남편이 그토록 정성들인 감나무 수확의 기쁨에 먹물을 뿌리는 감나무의 배신감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나 여리디 여린 고추 모종을 심었던 고추는 어찌나 실하게 통통하게 살찌우고 있는지 맵지도 않은 고추는 이젠 따지 않고 가을이 떠나가기 전까지 붉게 물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매운 것 싫어하는 남편 식성에 알맞은 식재료로 쓰일 것이다.
이제 며칠 전 맞이한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 라고 하는 말이 있듯 세월은 오늘도 말없이 달려가는 계절 속의 무덥던 한여름의 무더위도 서늘한 가을바람에 물러갈 것이고 모기의 극성스러움도 사라질 것이다. 풀숲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낭만을 부르고, 가을 추수를 마치고 나면 아직도 계획에 없는 여행길을 물색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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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자 /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