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세계 제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전 유럽 국가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농산물과 육류 등 농산품의 품귀로 경제적 고통을 받았다. 다행히 아르헨티나는 전쟁의 피해가 없어서 풍부한 곡물과 육류를 전 세계에 수출하여 엄청난 국부를 쌓았다. 당시 군부가 정권을 잡고 기업들과 깊이 공생하고 있어서 빈부 차이가 심해 노동자와 농민들은 극심한 빈곤의 속에 있었다.
부에노스 아레스 주 작은 마을인 로스톨로스의 부유한 농장주인 후안 두르테와 정부인 후이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에바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후난으로 옮겨와 무척 가난한 생활을 했다.
1944년 산 후안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6천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육군 대령 출신의 노동부 장관인 후안 페론이 이재민의 구호기금을 마련하려고 전국 각지를 돌며 모금 활동을 했다. 이때 페론이 뮤지컬 배우인 에바 두아르테를 처음 만나게 된다. 첫쩨 부인을 잃고 독신이었던 페론은 에바를 보자 첫눈에 품위 있고 매력적인 미모에 빠져 사랑의 포로가 된다. 에바와 페론이 결혼한다. 에바는 노래뿐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선동적인 연설력, 대인 친화력이 탁월했다.
전국적인 기금 모집 활동을 하면서 페론은 대중을 사로잡는 에바의 마성을 보고 감탄하며 대통령의 꿈을 키운다. 민중들은 에바 페론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대표인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도전하여 당선되였다. 페론 대통령은 국민적 인기와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기위해 각종 산업을 국유화하고, 노동자의 복지 정책의 확대, 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25%를 인상하고 사회주의 성향의 ‘페론주의’를 앞세운 정치를 했다. 그러나 무리한 사회 경제 정책의 실시로 1949년부터 지속적인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
그러자 반 페론주의자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페론 대통령을 구금한다.
페론이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자 에바 페론이 남편을 구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들에게 자신은 가난한 농촌 출신이며, 자신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며, 서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평생을 몸 바칠 것을 약속하고, 감성적이고 선동적인 연설을 하며 페론주의 지지를 호소했다. 전국의 노동자, 농민들은 모두 에바를 환호하며 그녀의 연설에 감동하고 열광했다. 에바를 지지하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후안 페론은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구금 10일 만에 전격 석방되었다. 후안 페론은 차기 선거에서 60%에 가까운 국민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페론 대통령보다 국민들은 에비타(에바의 애칭)를 더 사랑했다.
에비타는 페론의 지원으로 에비타 복지 재단을 세우고 파격적인 복지 정책, 여성의 투표권 관철, 성평등 등의 헌법상 보장을 실천하여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파격적인 복지 정책의 내용을 살펴본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에비타를 찾아오면, 병자를 병원으로 보내 무료로 치료해주었고,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살 집을 제공하고,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 박물관을 신축하여 수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도록 하고, 선물도 주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에비타에게서 받은 장난감을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에비타는 빈민의 구세주라는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병이 있는 빈민들이 에비타의 도움을 받으러 전국에서 몰려오자 부족한 병실, 간호사들 문제를 해결키 위해 병원을 증설하고, 1만명 이상의 간호사들을 교육시켜 환자들을 돌보게 했다.
에비타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에비타의 선행담은 국내를 넘어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그리스, 스위스, 이탈리아 정부들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다. 에비타를 향한 성대한 환영 인파들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2백만 달러(현재 시세: 4천만 달러)를 에비타에게 희사했다.
에비타는 가난한 빈자를 사랑했고, 언제나 빈자 편에 서서 빈자를 위해 헌신했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는 법. 파격적인 복지 정책을 실시하다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정부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복지 정책은 야당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페론 부부의 인기를 위한 포퓰리즘을 중단하라, 재정만 낭비했을 뿐 아직도 노동자들은 생활이 나아진 것이 없고 여전히 피폐하다. 페론주의를 중단하고 페론 대통령은 사직하라.”는 야당의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다.
1952년 에바 페론은 지병인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안 페론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비난은 에비타의 죽음으로 상쇄되었고,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로서, 빈민을 구한 잔 다르크로 국민적 추앙을 받았다.
세계 역사상 대통령 부인이 국민 편에 서서 죽기 전까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영부인은 일찍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인도 에바 페론으로부터 국민을 위해 베푼 참된 자비를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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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 그린벨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