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하루 전날인 8월 14일이 한산대첩 431주년 기념일이고, 특히 올해에는 <한산 용의 출현>이라는 이순신 영화 연작 2부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예외 없이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한일 간에 임진 침략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한산도 대결전이 어떠한 연유와 과정을 거쳐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속살을 헤짚어 보기로 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수군의 수영별 판옥전선 보유 척수로 조선의 해양방어 의지를 살펴보면 원균의 경상우수영 73척, 박홍의 경상좌수영 24척,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54척,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24척, 정걸의 충청수영 45척으로 왜구 등 침략의 위험지역인 경상도 해안 방어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막상 일본이 대 병력으로 쳐들어오니 경상 좌수사 박홍은 지례 겁을 먹고 수영을 버리고 잠적해 버렸고, 가장 많은 판옥 전선을 거느리고 있던 원균도 보유 판옥선 대부분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로 부셔 가라앉히고 수영을 떠나려 하였으나 충직한 부장들이 “어찌 장수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수영을 이탈하려 하느냐”며 매섭게 질타하는 바람에 겨우 남은 판옥선 서너 척을 거느리고 전라 좌수사 이순신에게 긴급 지원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수군이 맥없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본 일본 수군 대장 와키자카 등 세 장수는 해전은 부장들에게 맡겨놓고 상륙하여 육전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 앉아 조선의 전황을 살펴보고 있던 침략 원흉 토요토미는 전쟁의 달인답게 싸움에는 승패가 엇갈린다고 느긋한 마음을 지녀 왔지만 이순신 수군에게 1, 2차 일곱 번의 해전을 연달아 지는데 두 갈래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나는 바닷길은 육군의 북진에 따른 필수 보급로인데 그 길이 열리지 않아 침략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이순신의 두 차례 출전에 7회의 해전을 모두 패하여 일본 군선 약 100척이 격파되어 없어져 이동 수단도 문제지만 배를 만들어 보충하기도 숨이 가빴던 것이다.
이에 토요토미는 이순신을 격파하지 않고는 만사가 허사라고 결론짓고 엉뚱하게도 육전에 참전하고 있는 수군대장 와키자카, 구키, 가토 3인에게 남해로 내려와 힘을 합해 이순신을 격파하라는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바로 이 특명이 한산도 대결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인 광교산에서 불과 2천명의 기병으로 조선 농민 선비 근왕병 6만을 몰살시켜 기세가 하늘처럼 높아진 와키자카에게 이순신은 상대로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전공을 독차지 하려는 공명심에 들떠 혼자 앞서 남해로 내려와 한산해전에 단독 출전하여 이순신 학익진의 먹이가 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남해에 도착한 구키와 가토는 진해 안골포에 진을 치고 와키자카의 비참한 패전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한산해전 이틀 뒤인 7월 10일 이순신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아 대형 군선은 모두 격파당하고 밤을 틈타 소형 군선을 타고 부산 본진으로 퇴각함으로써 일본 수군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날자는 이틀의 차이가 나지만 한산대첩 하면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이 해전 이후 토요토미는 조선에 출병한 일본 수군에게 ‘앞으로 이순신을 만나거든 싸우지 말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육지 해안으로 피하라’는 피전 명령을 내렸으니 아마도 그 의도는 이기지 못할 바에는 선박이나 아껴야 되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끝으로 첫머리의 수영별 판옥전선 보유 척수를 보면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은 다른 수영의 3분의1 또는 절반 밖에 안 되는 가장 적은 24척에 불과했지만 결국 거북선을 개발하는 등 치밀한 준비와 구국 일념으로 나라를 구해내고 한중일 3국 관계를 올바른 역사 궤도에 되돌려 놓았으니 참으로 우리 모두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
이내원 / 이순신 숭모인,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