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교육위원 선거를 앞두고 두 어 주 전부터 내 선거홍보 사인판을 후원자들에게 꽂아 줄 것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후원자들은 사인판을 짚 앞뜰에 꽂아준다. 콘도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분들은 앞뜰이 없어 대신 거리에서 보이는 창문이나 베란다에 걸어 놓기도 한다. 모두 참 고맙다.
이제는 과거처럼 더 이상 사인판을 길거리에 꽂지 않기 때문에 예전에 비해 사인판 제작에 드는 비용과 길거리에 꽂기 위해 소요되는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다.
길거리에 사인판을 꽂는 게 사실은 과거에도 불법이었다. 하지만 주정부가 단속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후보자들이 꽂았기에 어쩔 수 없이 나도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 10년 전부터 로컬 정부가 단속하고 벌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 받으면서 적어도 페어팩스 카운티에서는 길거리 사인판이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과거처럼 만 장 씩 주문해 꽂던 수고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내 사인판은 내가 처음으로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했던 1995년 이래 지금까지 줄곧 노란색 바탕이다. 노란색 바탕 선거 사인판은 드물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깔은 미국 국기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색깔, 즉, 빨간색, 하얀색 그리고 파란색이다. 처음 노란색 배경의 사인판을 접한 사람들 중 나에게 조심스럽게 색깔 선정 배경을 물어 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마도 내가 황인종으로 불리는 동아시안이기에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교육위원 후보자인 나에게는 스쿨버스가 교육과 연결되는 상징 중 하나로 여겨졌고 노란 스쿨버스 색깔이 눈에 확 띄기에 배경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사인판에서는 내 이름 석자 문.일.룡. 중에서 성 (last name) Moon (문) 한 자 밖에 볼 수 없다. 1995년 처음 선거에 출마했을 때 캠페인 매니저가 내 이름을 변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진지하게 권한 적이 있었다. 미국인들이 내 First name인 Ilryong (일룡)을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L과 R 두 자음이 겹쳐 있는 부분은 모두 어려워했다. 물론 그 이름의 철자는 내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이민올 때 수속을 도와 주신 분이 정해 주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게 달라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간혹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하기도 했다. 한국어에는 L과 R 발음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받침과 첫음에서의 ‘ㄹ’은 발음이 서로 약간 다르다. 받침은 L 그리고 첫음은 R에 더욱 가깝다. 그리고 L과 R 중 하나를 생략하면 내 이름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름 변경을 고민해보았지만 그 당시 거의 40년가량 사용했던 내 이름을 선거 때문에 고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거나 외국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표를 찍어 줄 수 없다면 그런 표는 받고 싶지 않다는 내 나름대로의 자존심도 있었다.
그래서 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대신 사인판에는 Moon 한 자만 사용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사인판은 주로 운전하고 지나가다 보게 된다.
그런데 발음하기도 어려운 first name을 살펴보느라 정작 사인판을 통해 알리려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정보, 이를테면 내가 출마한 자리 등의 정보에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경우를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밤하늘에 뜨는 ‘달’이라는 뜻을 가진 특이한 last name 덕분에 유권자들의 머리 속에 내 이름에 대한 각인은 충분히 되지 않겠나 싶었다.
올해 선거를 위해 제작된 내 선거 사인판을 보면서 다른 후보자들은 내 사인판의 간결한 디자인을 내심 부러워 하는 것 같다. Moon이라는 간단한 한 글자만 기억하면 되는 점이 강렬한 배경 색깔과 더불어 유권자들에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국 선거에서 내 이름이 이렇게 복잡하고 간결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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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