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박사 연구로 한국 사학계에 큰 공적을 남긴 유영익 교수가 지난 7월 26일 노환으로 87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유 교수와 함께 한동대에서 2007년부터 4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던 지난 날들을 회상해 본다.
나는 2007년 봄 학기에 연세대학교에서 석좌교수직을 사직하고 한동대 석좌교수로 옮겨 온 유 교수를 대학도서관 2층 유 교수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다. 나의 연구실이 바로 유 교수 연구실 옆에 있었다.
유 교수는 한국근대사를 가르쳤으며 나는 2000년부터 2011년 11년 동안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가르쳤다. 그 후 우리 둘은 다른 교수들보다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 이유는 우리는 70대 초반으로 유 교수가 나보다 한 살 위였으며 당시 한동대 교수들 평균 연령이 40대 초반으로 우리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독신인 유 교수와 나는 교내 교수 아파트에서 함께 지냈다. 우리는 새벽 5시반 쯤에 일어나 교내 산책을 한 30분간 하다가 대학 교회에서 6시 새벽 예배를 드리고 학생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연구실로 갔다.
우리는 새벽 30분간의 산책시간을 통해서 개인적인 또는 공동관심사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 산책을 할 때 또는 둘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가끔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특히 대학생들이 한국근대사를 배우고 인식하는데 대해 많은 걱정을 나누었다. 우리는 1945-48년 광복이후 대한민국 건국 과정, 1950-53년 6.25전쟁의 원인, 과정, 정전 후 사태, 1954-60년 전후 재건과 정치 혼란기 등에 대해 사실(史實)이 곡해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이 근대사적인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의 역할과 영향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대한 의견도 거론이 되었다.
이승만 박사의 공정한 평가는 일제하 독립운동, 광복 후 건국 과정, 6.25전쟁에서의 역할과 한미동맹 체결, 3.15부정선거와 4.19혁명 등 일련의 역사 과정을 통해 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데 우리는 공감했다.
나는 유 교수의 추천으로 2011년 5월 26일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프린스턴 한겨레문화연구회(대표 이종숙) 주최 제76회 강연회에서 ‘한국 6.25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강연에서 링컨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리더십에서 두 분의 공통점들을 비교 분석했다.
1964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 수감중에 쓴 저서 ‘독립정신'을 읽고 이승만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정한 유 교수는 숨지기 전까지 이승만 연구에 일생을 헌신했다. 유 교수는 한림대 역사학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하는 동안 우남사료연구소를 설립, 이승만 박사 사저 이화장에 있는 10여만장의 자료를 분류 분석 정리했다.
연세대 석좌교수로 있는 동안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창설, 초대 소장을 지내면서 이승만 연구에 몰두했다. 유 교수는 그 동안 ‘이승만의 삶과 꿈'(1996), ‘이승만 연구'(2000), ‘젊은 날의 이승만'(2002),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2006), ‘건국대통령 이승만'(2013) 등 많은 이승만 관계저서를 펴냈다.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 하버드대 인문대학원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휴스턴대 역사학 부교수, 고려대 사학과 교수, 한림대 사학과 교수, 연세대 석좌교수, 한동대 석좌교수를 역임하면서 이승만 연구와 그의 재평가를 이끌어낸 유 교수의 업적은 한국 학계에 길이 남을 것이다.
<
허종욱 전 한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