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나 족히 될 듯하다. 영국 여행을 하던 중에 셰익스피어 하우스(박물관)에 들렀다. 그곳 한 귀퉁이에서 아주 흥미로운 관경을 보았다. 무대가 아니라 둥그런 원이 있었고 방문객 아무나 원하면 그 안에 들어가 서서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대사를 낭송하면 남녀 배우가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를 해 주었다.
예를 들어 방문객이 햄릿의 대사를 낭송하면 여배우가 여주인공 오필리아가 되어 낭송을 이어갔고, 방문객 여자가 줄리엣의 한 구절의 대사를 낭송하면 남배우가 로미오가 되어 주었다.
영국인들은 아마 모두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구절쯤은 모두 암송할 줄 아는 듯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영국인 모두가 대사를 외울 만큼 그의 작품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불후의 명작을 넘어 그리 절대적이었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50% 정도 동의한다. 왜 50%인가? 그러면 나머지 50%는? 그에 앞서 셰익스피어 시대를 좀 설명하고 싶다. 당시의 영국의 왕족들은 프랑스 출신이거나 프랑스에서 온 왕비들이었고 그래서 왕족을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썼다.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말 즉, 영어로 대화를 했으나 지방마다의 사투리로 서로 대화의 불편을 느끼는 상태이었다. 이때에 셰익스피어가 나타나 그의 작품으로 영국의 표준말을 보급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공로가 나머지 50%이란 말이다.
좀 더 넓게 이야기하자면 15세기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16세기에 널리 보급되던 시대에 영국의 셰익스피어, 그리고 스페인의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작품들이 작품도 작품이지만 언어의 통일그리고 보급화에 큰 역할을 하였고 그래서 그 영향력과 효과를 모두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새삼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 일본 방문 중 일본 사람들의 과잉에 가까운 그 친절한 말을 들으면서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 같은 사람을 갖지 않는 일본 사람들의 그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는 말이 어찌해서 태어낳는지 생각하게 되어서다.
사실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는커녕 전국시대라는 서로 죽이는 전쟁만 하고 급기야 임진왜란만 일으켰는데 어찌 그런 말이 생겨났는가 말이다.
이러한 의구심이 여행 내내 나의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야스쿠니 신사 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전시실 가운데에 있는 소위 일본도(日本刀)를 보는 순간 아!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시대는 각 지방 영주들이 소위 사무라이들을 부하로 쓰며 지배하며 살았다.
그 사무라이들에게는 법이니 재판이니 이런 것은 없었다. 그저 마음에 안 들면 일본도로 죽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니 언어가 풍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은 사무라이들이 필요한 극히 제한된 단어만 앵무새처럼 그것도 아양을 떨며 말하며 살았고 여자들은 그것에 더하여 기모노를 입고 다니다가 사무라이가 원하면 그저 풀밭이건 숲이건 드러누워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어야 했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 즉 혼네라며 이를 잘 나타내지 않는다 하는데 사실인즉 혼네가 아니라 쓸 때 없는 말하다가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입을 담고 살았다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나름대로 단정을 내리고 그들의 친절함을 이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좀더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니 이제 이것 또한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듯 했다. 아직도 길거리에는 담배 꽁초는 물론 종이 한 장도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했고 길거리에서나 식당에서나 어느 공공장소에서나 청결함은 정말 세계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이제 답답할 정도의 중년여인들의 몸차림과 달리 발랄한 옷차림, 활달한 걸음, 명랑한 대화이라고 할까 재잘거리는 젊은 여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 듯했다.
다시 말하여 사무라이 등살에 습관이 되어버린 상냥하고 아양을 떠는 듯한 그들의 대화는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마음속의 말을 못했다는 소위 혼네라는 단어는 없어지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일본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더 건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곁으로 맴도는 상냥과 아양보다 솔직함이 더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부연하자면 요즈음 한일 외교에서 과거와 달리 일본 측이 감히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하며 놀랄 만큼 대담한 말을 내뱉는 것 같다. 그것 또한 세태의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혼네하며 마음을 감추는 것 보다 솔직한 표현이 상호 이해와 접근에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언론에서 비판의 글을 보고 있지만 근간에 때로는 귀에 거슬리는 양국 회담의 대화를 긍정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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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 / 문인/ 맥클린,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