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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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의 북한 내 생활실태

2023-05-16 (화) 제성호 /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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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6·25전쟁 초기 사전기획에 의해 남한 지역에 감금 내지 구금했던 사람들을 전황의 전개에 맞춰 단계적으로 북송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전시납북자들 중 상당수의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북한군에 강제로 편입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강제 입대가 부적합한 사람들은 후방에서 방공호 굴착, 도로 및 교량 수리 등의 강제노역에 동원하였다.

북한에서 체류하게 된 뒤 전시납북자들에겐 자유로운 이주는 물론, 거주지와 직업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치인 출신 납북자들은 정전협정 체결 후 대남 통일전선운동에 이용되다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 영향을 받아 불순분자로 분류됐다. 이후 강압적인 사상교육 등을 받다가 농장이나 공장노동자로 밀려났다. 사회저명인사나 의료계, 문화계 등 ‘반동분자’로 분류된 인사들은 대부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중노동을 해야 했다.
전시납북자들은 개인의 능력이나 전문성이 반영되지 않은 농장이나 탄광의 형태를 띤 수용소에서 포로와 다름없이 억류된 생활을 하다가 강계, 함북, 만주 방면으로 이송되었다. 그들 중에는 강계, 만포, 위원, 초산 방면으로 이송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일부가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강제 이송되었다.

체제 선전에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전시납북자들은 대체로 탄광이나 광산지역으로 추방되었고,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생활하였다. 북한은 체제보위 기관들을 통해 전시납북자의 동향을 추적했고, 직장이나 인민반 등을 통해 일상생활을 감시하였다. 북한 사회에서 남한 출신이라는 배경은 전시납북자 가족에게 세습되었다. 자녀들은 진학과 결혼·진로 등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경험했다. 납북자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당과 직장에서 주요 직책을 맡지 못하였고, 대학교육, 군 입대, 직업선택과 승진 등에서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전후납북자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북한은 납북자들 중 일부를 대남방송이나 간첩교육에 이용했다. 1969년에 납치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성경희, 정경숙 등과 같이 대남(對南) 방송에 활용되거나, 홍건표, 이명우의 경우처럼 대남 공작원들에게 한국의 실상과 말씨 등을 교육하는 “이남화 교육”의 교관으로 쓰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납북자들은 승호리 수용소 등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다.

북한은 전후납북자들을 7일 내지 10일 정도 조사한 다음 이들로부터 김일성주의자로 살겠다는 충성맹세를 받았다. 조사를 마친 후 평양 인근 지역이나 원산 등지에서 6~16개월 정도 집중적인 사상교육을 한 다음 송환 여부를 결정했다. 강제억류(불송환)로 결정된 납북자에 대해선 다시 충성심과 활용도에 따라 분류하여 추가 교육을 실시한 후 대남사업 분야 인력으로 선발하거나 사회에 배치하여 거주지역과 직장을 정해주었다.

전후납북자들은 일반 북한주민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당, 보위부, 안전부, 인민반 등을 통해 중첩적인 감시를 받았다.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는 개인 의사에 의한 행동을 하거나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다.
오직 감시의 눈을 의식하며 북한 당국의 신임을 받기 위한 행위만을 강요받았다. 이들은 좋은 직장을 얻거나 당원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어렵게 당원이 되거나 직장을 얻더라도 당이나 직장에서 진급하거나 요직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납북자들의 북한 생활은 최하층민 수준이었다. 납북자 본인뿐 아니라 그 자녀들도 출신성분으로 인한 불이익과 차별을 받았다.
전시이든 전후이든 납북자들의 상당수가 가장이었다. 때문에 납북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고 남한에 남겨진 가족들은 생계를 위협받았다. 납북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납북사건의 반인륜성과 비극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제성호 /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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