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도(道)를 설명하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56장에 나오는 말이며 ‘참 빛은 빛나지 않는다’라는 불가(佛家)의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말과도 속뜻이 일치하는 말이다. 무위(無爲), 즉 ‘인위적으로 꾸미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가르친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知者不言/지자불언),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言者不知/언자부지)’라며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심을 누르고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자신의 지덕과 재능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속세와도 어울림으로써 오히려 귀하게 되는 것이며 자신의 지식을 과장해서 내세우거나 거짓을 사실처럼 꾸미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사익을 취하려는 세속적 사람과는 크게 다름을 가르친다. 또한 고금의 많은 현자(賢者)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비판과 폄훼(貶毁)의 구실로 삼아 상대방을 헐뜯는 사람을 소인배(小人輩)라 하였고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되돌아 보라 하였다.
노자는 도덕경 66장에서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에서 왕 노릇 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이 백성보다 위에 오르고자 하면 반드시 스스로를 낮추는 말을 해야 하고, 백성보다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그들보다 뒤에 두어야 한다. 이 때문에 백성이 성인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은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천하가 즐겁게 추대하고 싫증 내지 않는 것이다’ 라 했으니 이는 ‘귀함이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음이란 낮은 것을 기초로 삼는다(도덕경 39장)’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거나 깨우치는 것이 있으면 다른 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데 이는 어쩌면 인지상정이라, 굳이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자는 도덕경 71장에서, ‘스스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요,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병이다’라고 말했고 공자는 위정편(爲政篇)에서 ‘어떤 것을 알면 그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맹자도 이루상(離婁上) 편에서 ‘사람의 병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 말하였으니 이 모두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 주위에는 학식이 높지는 않아도 지혜롭고 겸손한 말과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의 찬사와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오랜 삶 속에서 고통을 겪고 많은 경험과 성찰을 통하여 책이나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축적되고 다듬어진 사람이다. 마치 잘 간직된 오래된 술이 더 깊고 그윽한 맛을 내는 것과 같고, 빛이 평소의 겸손한 삶 속에 묻혀 부드러워진 화광동진과 같다고 하겠다.
성자(聖子)이신 예수님은 육화강생(肉化降生) 하시어 그 지극한 사랑과 겸손으로 세속의 인간과 똑같이 먹고 생활하며 아픔을 위로하시고 수난 하시어 인류를 구원의 길(道)로 이끈 참 빛이시니 보잘것없는 티끌과 같은 인간과 하나가 되신 진정한 화광동진의 표상이시라고 부활절을 기다리며 묵상해본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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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