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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3-03-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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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이름 작명 참고서, 성경책

동네 이름 지을 때 성경 책을 참고서로 삼는 게 미국의 한 특징이다. 원주민이 부르던 대로 또는 두고 온 고향 동네에 뉴(New) 자 앞에 붙이는 신촌 스타일이 안이하다고 한다면 성경의 지명 따기는 그래도 공부 좀 해야 하는 작명법이다.
여기가 신대륙인가 근동 아시아인가 의문이 날 정도다. 성경에 나오는 1천 개 가량의 지명이 미국의 지도에 등장하고 그중 4백 개 가까이는 성경 구절에서 따왔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많이 등장하기는 역시나 예루살렘의 살렘. 제루살렘 혹은 평화라는 어원의 세일럼(Salem)의 지명이 있는 주가 미국 전체 50개 주의 절반을 넘는다. 초기 식민지를 뒤흔든 마녀 재판의 진원지 메사추세츠주 세일럼이 그 대표라고 하겠다.
동북부를 차 타고 다니다 보면 베다니, 베데스다, 벧엘, 베들레헴, 가나안, 여리고, 헤브런 그런 동네를 쉽사리 마주친다. 다마스커스, 레바논, 팔레스타인도 많은데 그곳 출신 이민자들과는 아무 관계 없다. 성경적 맥락에서 지은 경우들이다.

선견지명 대신 성경지명이 유독 많은 배경은 아무래도 퓨리탄 청교도에 기원을 둔다.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자처한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을 이집트(영국) 왕 바로(조지 3세)의 학정에서 탈출을 한 히브리 노예들로 여겨 출애굽기의 서사를 특히 좋아했다. 뒷날 그들과 인종과 신앙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억압받던 흑인 노예들의 소망 또한 그랬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라 모세 가서 말하라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켜라. Go Down Moses!


고센(Goshen)이 작명에서 인기인 것도 그런 연유인 듯 싶다. 요셉이 이끌어 야곱의 일가가 애굽에 가서 정착한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이주민의 정서와 맞아 떨어진다. 조든(Jordan), 요단 강도 자주 등장한다. 자유를 찾아 북극성(North Star)을 바라보며 언더그라운드 레일을 달려온 흑인 노예들은 오하이오 강을 요단 강(River Jordan)으로 불렀다.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는 슬픔의 승화가 아니라 마침내 자유의 땅에 이른 벅찬 환희의 외침이었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성경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칠 이름들 또한 많다. 더군다나, 재수 없겠지만, 미국식 영어로 듣는다면?
뉴욕의 타이어(Tyre, 레바논의 항구도시 티레), 아칸소의 실로암 스프링(Siloam Spring, 나면서 소경인 자를 고친 실로암 샘), 역시 아칸소의 파트모스(Patmos,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살던 밧모 섬), 캘리포니아와 콜로라도의 오피어(Ophir, 솔로몬이 지녔던 금의 출처 오피르), 뉴욕의 니너버(Nineveh, 구약에 등장하는 큰 도읍의 대명사 니네베 혹 니느웨), 아칸소의 님로드(Nimrod, 탁월한 사냥꾼이자 바벨탑을 쌓은 영걸 니므롯), 뉴욕의 베쓰페이지(Bethpage,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머물며 어린 나귀를 찾아오라던 감람산 인근 동네 벳바게), 아칸소의 게쎄머니(Gethsemane, 겟세마네 동산), 펜실베이니아의 이메이어스(Emmaus, 부활한 예수가 길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났는데 엠마오 가던 중), 아칸소의 뷸러(Buelah,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을 혼인한 신부처럼 기쁜 땅 뷸라라 하리니), 노스캐롤라이나의 니보(Nebo, 죽음을 앞둔 모세가 올라가 먼발치의 약속의 땅을 내려다 본 느보산)….

한편 남북전쟁의 본격적인 첫 전투가 벌어져서 유명한 우리 동네의 매나사스(Mannassas)는 사정이 다르다. 성경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의식해서 지은 지명은 아니다. 요셉의 자식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를 세운 므낫세(Manasseh)는 유대인 남자의 이름으로 많이 써온 터, 전투가 벌어진 들판 가까이에서 여인숙을 하던 이의 이름이 동네 이름이 된 경우다. 북군에서는 이 전투에 그 들판의 개울을 따라 불 런(Bull Run) 전투라고 불렀고, 남군은 매나사스 전투라 불렀다.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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