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3-03-07 (화)
어려서 읽은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이 그렇게 좋았었다. 전쟁과 이산의 사연이 넘실대던 나의유년기, 60년대의 정서가 그러했겠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 나문희-신은경의 영화 ‘수상한 그녀’를 보면서 비슷한 모티브의 그 동화가 떠올라 행복했다. 인터넷에서 찾아 다시 읽었다.
‘한국아동문학’을 추억하는 정도로 그치면 좋았을 것을, 욕심은 진행형이다. 불길이 ‘세계아동문학’으로 번지고 가장 좋아했던 그 얘기, 음 제목이 뭐였지.
물레방앗간(19금 아니다). 밀가루를 빻는 젊은 부부와 어린 딸. 자기 이름 멋대로 옹알대던 어린 딸이 어느 날 사라졌다. 찾아도 찾아도…. 엄마는 마음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홀로 된 아빠는 고향을 떠나 큰 제분업체를 일군 사장님이 된다. 곰표밀가루처럼 딸의 이름을 붙인 밀가루. 부자아빠는 고향에 돌아와 옛 물레방앗간을 교회로 꾸민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을을 찾아온 젊은 처자….
이렇게 내용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이 나는데 제목이 가물가물. 아, 맞다, 물레방아가 있는 교회! 여기까지 이르니 더욱 궁금해졌다. 영어로 뭐지? 실화였나, 아니면 작가가 있는 픽션인가? 궁금하면 어떻게 하라고? 구글을 뒤졌다.
물레방아가 있는 교회라, 물레방아가 뭐지? 프라우드 메리?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Big wheel keep on turnin’…. 땡큐, 단서가 됐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제목.
물경 오 헨리의 단편이다. 오 헨리가 누군지도 몰랐던 꼬꼬마 시절에 읽었던 것이다. 물레방앗간은 워터 밀(water mill) 혹은 그냥 밀(mill)인데 그걸로 찾았으면 한참 돌아갈 뻔 했다. 밀이라는 단어는 이곳 동부 애팔래치안 기슭의 구릉지대 길이름에서 아주 흔히 등장한다. 이야기의 배경 역시 노스캐롤라이나. 밀을 빻는 밀, 외우기도 쉽네. 방앗간 주인은 밀러.
오버샷이라는 표현은 물레방아 돌아가는 사연을 알아야 이해된다. 정통파 오버드로 투수처럼 물이 꼭대기 위에서 떨어지며 수차를 돌리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구를 듯이 돈다. 반대는 아래에서 흐르는 물로 돌리는 언더샷 방식이고 바퀴는 오버샷의 역방향으로 돌겠다. 세상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절충이 있다. 옆구리에서 물이 떨어지는 방식인데 옆구리 대신 가슴을 써서 브레스트샷(breastshot).
그 시절에는 흔한 일상용어였겠지 싶다. 4기통이냐 6기통이냐 따지고 테슬라 전기차냐 토요타 프리어스 하이브리드냐 따지듯이 기술용어가 일상어에 들어온 예다.
검색 과정에서 한자와 일본어 섞인 ‘水車のある…’가 들어간 페이지들이 투두둑 튀어나오는 걸로 봐서, 이 단편 역시 일본에서의 열화와 같은 반응이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어지고 어린 나는 그 끝물을 핥고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흐름이야 뭐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이번에 다시 오디오북으로 들어보니 어린 날의 감동은 한결 덜하다. 부녀 상봉의 클라이맥스가 지나친 우연으로 엮여 억지가 느껴져서일까. 크게 아쉽지는 않다. 일찌감치 오 헨리는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존재였으니까.
딸애가 그림책으로 시작해서 영어를 배우고 책에 재미를 붙여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심 아빠로서 기다려왔던 게 오 헨리였다. 오 헨리를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아이와 할 얘기가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가 컸었다. 오 헨리, 마크 트웨인 말고 아는 작가가 또 있나 뭐.
그림책 졸업하고 여기서 챕터북이라고 부르는 제법 두툼한 책을 찾기 시작했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에서 오 헨리 단편을 찾아 빌려다 주었다. 마지막 잎새, 이십년 후에… 같이 할 얘기가 무궁무진할 줄 알았는데 웬걸 애는 재미없고 지겹다며 기브업. 왜, 왜 이게 재미없지… 그런데 영어로 읽으며 나도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주인공이 ‘department store girl’이라는데 영 감이 오지 않는 게다. 그 당시 백화점의 위상이 어떤 건지 거기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감감하니 얘기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겠더라고. 물레방앗간 교회의 주인공, 잃어버렸다가 찾은 딸 역시 백화점에서 일하는 처자로 나온다. 참한 처자인지 아니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미미했던 시절이니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걸 아는 까진 처자인지. 요즘 드라마에서 졸부들에게 갑질 당하는 백화점 직원들 같았을까. 기억은 다르게 적히고 책도 다르게 읽힌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