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은 오는가
2023-02-22 (수)
윤영순 / 우드스톡, MD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 이 말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마음속에 새겨보았을 철학자 스피노자의 명언이다. 최근 튀르키예와 시리아 접경지역에 강력한 7.8 규모의 지진으로 아비규환이 된 참사의 현장을 TV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지켜보노라면 그 피해규모가 너무나 엄청나고 처참해 할 말을 잃게 된다. 앞으로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언제 어떤 일이 터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는지. 그때마다 지구 종말이 가깝다는 말들을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삶의 희망이 없었더라면 인류 역사가 지금껏 어떻게 씌어져 내려 왔을까 의구심이 든다.
계절은 어김없이 입춘이 지나고, 거리에는 아련한 아지랑이 사이로 봄 처녀가 제 넘어 오실 듯 메릴랜드의 이번 겨울은 무난하게 설한의 추위를 피해 가는 듯하다. 몇 년을 벼루기만 하던 고국방문을 코앞에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먼저 미용실을 찾았다. 누가 여자의 변신을 무죄라 했던가? 몇 년째 코비드 19로 미용실 발길을 끊고 집에서 길게 기른 흰 머리카락을 이번에는 과감히 짧게 자르고, 염색과 파마로 ‘빨강머리 앤’처럼 단숨에 헤어스타일 하나만으로 변신을 시도해 보았더니 세월을 몇 년은 되돌려 놓은 듯 젊어 보인다고 주위에서 입을 모은다. 밝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칭찬인데 잃어버린 젊음이 이런 기분이라면 이따금 만들어서라도 느껴보아야겠다.
가끔씩 주위를 둘러보면 자녀들이 살고 있는 다른 주로 뒤늦게 따라서 이사를 하거나, 사시사철 따뜻한 지역으로 휴양 차 거처를 옮겨 다니는 ‘철새(snowbirds)’들도 눈에 뜨인다. 그런가 하면 중년에 이민을 와서 고생 끝에 자녀들을 모두 잘 키운 뒤 여생을 고국의 고향을 찾아 역 이민을 결행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아왔다.
이제는 오랜 기간 가까이 사귀어 숙성될 대로 숙성된 ‘묵은 지’ 같은 고향의 친구들도 해를 거듭하면 할수록 그토록 관심사였던 궁금증도 사라졌는지, 아니면 몸의 기능마저 무디어져 가는지 이제는 일상의 무미건조한 대화마저 끊어질 듯 띄엄띄엄 이어져 간다. 이따금 무기력해지는 분위기를 반전시켜주기라도 하듯이 슬그머니 무슨 인연인지 나 보다 나이 젊은 초로의 친구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그녀는 나와는 달리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 자녀들 모두 결혼시키고 남편과 단둘이 알콩달콩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넓은 미국 땅 이곳저곳에 살고 있는 자녀들을 찾아 여행을 자주하는 그녀를 보며 ‘가방을 든 여인’이란 별명을 붙여 준 그 이면에는 메릴랜드에서만 붙박이처럼 살고 있는 내 경우를 빗대어 붙여준 이름이다.
“언니 같은 이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인생이 보다 풍성해졌을 텐데, 이제라도 아쉽지만 소중한 인연 정겹게 이어가며 살아요.” 아침이면 안부전화로 시작해서 틈틈이 마음의 공허감을 채워주는 이 친구가 삶의 재미를 더해준다. 한결 같이 이대로의 내 모습을 좋아해 주는 비타민 같은 그녀. 어느 날 문득 늦은 나이가 되고서야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되는 이즈음, 평범한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행복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심은 대로 거둔다고 당장 증명이라도 하듯, 겨우내 가꾼 작은 실내 정원의 난 화분 속에 화사한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봄은 저만치 손짓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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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