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사학자 이만열 선생의 글을 2월 9일 플로리다 여행 중 이메일로 받아 읽었다. “베트남에 용서를 구하면서”라는 제목 아래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으로부터 피해를 본 민간인이 한국정부를 상대로 승소한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마음에 맺혔던 체증이 가라앉는 듯하다는 내용이다.
다음날 저녁 숙소에 돌아와 뉴스를 검색했다. 청룡부대 해병대원들이 1968년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2월 7일 처음으로 나왔다는 소식이 모든 신문에 보도됐다. 55년이나 지난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지만 크게 환영한다.
우리는 일본이 조선침략 역사를 왜곡하며 약탈과 학살을 부인하고 사과하지 않는다고 분노하면서도, 우리 역시 베트남 전쟁을 왜곡하며 만행을 부인하고 사과하기를 거부해왔다.
베트남전쟁은 가장 명분 없고 사악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 1964년 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미국 구축함을 북베트남 어뢰정이 먼저 공격했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온 세계가 반대한 그 더러운 전쟁에 한국은 인구 비율로 따지면 미국보다 2-3배 더 많은 병력을 보냈다.
이러한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내가 보고 듣고 겪어온 일을 소개한다. 한국의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전쟁에 뛰어들기 시작한 1965년 초등학생이던 나는 다음해부터 맹호부대 노래를 유행가처럼 불렀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는 찬가였다. 난생 처음 위문편지도 써야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파월 장병 아저씨께” 머나먼 땅에서 자유를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 많으시냐며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드렸다.
1980년대 미국의 대학원에서 베트남전쟁이 베트남의 해방과 독립을 막기 위한 미국의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공부했다. 베트남에 참전했던 소설가 황석영이 “월남이 패망했다”는 1975년 ≪무기의 그늘≫이란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다 정부의 탄압으로 중단 당하고 1980년대 초 다시 시작하다 또 중단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1985년에야 2권짜리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그 무렵 알았다.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베트남전 파병은 용병을 보낸 것”이란 취지로 강연했다가 군부와 여론의 반발에 해임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부터 변화가 생겼다. 김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두 나라 사이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러한 유감 표명마저도 야당과 극우언론의 반발을 불렀다. 2001년엔 서울을 방문한 베트남 주석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처음으로 사과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고 사과 아닌 유감을 표명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역시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은 베트남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비슷한 유감을 표했다.
2000년 나는 세계 일주에 나서는 일본 ‘평화의 배’에 올라 강연하며 일본인들과 베트남 다낭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다낭은 1965년 미군들이 처음 상륙해 베트남에서 가장 큰 육해공군 기지를 설치했던 곳이다. 박물관 거의 모든 전시실은 미군들과의 투쟁이나 미군들에 의한 양민학살에 관한 자료로 메워진 것 같았다.
한 전시실엔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우고 다낭에 상륙하는 남한군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었다. 바로 옆 전시실에는 북한 지도자들이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격려하는 편지가 크게 확대되어 걸려있었고. 베트남전쟁이 제2의 한국전쟁이었던 걸 생생하게 보여줬다.
1960년대 중반 남한이 전투 병력을 파견하고 전쟁이 확대되자, 존슨 정부는 남한의 추가 파병을 강요하다시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남한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북한은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각각 베트남에 파병했을 뿐만 아니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에서도 수많은 전투를 벌였기에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었다.
2023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박진수 부장판사의 용감하고 현명한 판결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한다. 이 글을 쓰는 계기를 마련해준 이만열 선생과 박진수 판사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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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 원광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