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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2023-02-07 (화)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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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고전하면 1939년에 출판된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 1960년에 출판된 ‘앵무 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을 뽑을 수 있다.
‘분노의 포도’는 뉴욕타임지 기자 출신 작가였던 존 스타인 벡(1902-1968) 소설로 노동과 착취를 고발한 사실주의 문학 작품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하퍼 리(1926-2016)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로 편견과 차별을 폭로한 법정 드라마 소설이다. 두 소설 모두 미국 고교 영어 수업 커 리큘럼 필독서라는 사실을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를 다녔던 딸과 아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실 필자는 ‘앵무새 죽이기’ 영어판을 우리 애들보다 수 십년 앞서 접하게 되었다. 특별히 영어를 잘 해서가 아니고 그 당시 한글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니고 있는 광주일고 동문 선배를 통해 엉겁결에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사실 그 당시 내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도 절실함도 없었다. 몇 년 동안 묵혀둔 후 병장 휴가 때 먼지 투성인 책들을 뒤지다 챙겨, 온 산이 설경으로 뒤덮인 강원도 화천 최전방 DMZ GP 벙커에서 인종차별보다 더한 천부인권을 유린당하며 고통으로 신음한 북녘 땅을 마주보며 읽게 될지는 몰랐다.

선배의 어머니는 미망인으로 광주에서 하숙집을 홀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선배는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 집에서 고교시절 하숙을 하고 있었고 그 해 겨울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하숙으로 방이 여유가 없자 고교 선배라는 이유로 나와 방을 함께 쓰게 했다.

그렇다고 하숙비를 내려 주지는 않았다. 선배는 미안했던지 나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지금 “동화책을 읽으라고 주신 겁니까” 책 표지의 삽화와 제목만 보고 내린 나의 편견이었다. 선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웃기만 했다. 방학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선배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앵무새 죽이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며 작가가 10대 어린 소녀였을 때 1934년 남부 앨라배마에서 목격한 것 들이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만연한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종차별과 그것이 사법제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대공황으로 인한 빈곤이 소설의 배경이다. 변호사 애티커스는 선량한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이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강간 혐의로 억울하게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마을 주민들의 온갖 폭언과 살해 협박속에서도 헌신적인 변호를 한다.

법정에서 결백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지만 원고는 백인 여성이며 피고는 흑인 남성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로 유죄가 선고된다.
폭력에 당당하게 맞선 그가 어느 날 먼로빌 마을을 위협하는 광우병에 걸린 미친 개를 아이들 앞에서 잔인하게 쏘아 죽인다. 이 사건은 딸 스카웃과 그녀의 오빠, 그리고 아이 친구들에게 충격을 준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정의는 분명히 법이나 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서 오는 걸까? 작가는 복잡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정의는 부분적으로 옳은 것에 따라 살기로 한 개인적인 소신을 통해 반영 된다는 것을 변호사 애티커스를 통해 은연 중 표출하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 놀고, 집 밖에서 모험을 찾고 자라며, 위태로울 땐 서로를 돌 본다. 이 소설은 또한 협력과 친절, 존중을 통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악몽 같은 사회에서도 순수함과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악한 권력자와 선량한 시민의 유일한 차이점은 ‘똑바름’이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주권자를 결코 물지 않는 다. 그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침묵을 분노 모드로 바꾸어야 한다. 저항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굴복은 복종이며 비겁한 행동이다.

금붕어처럼 침을 꿀꺽 삼키면 권력을 악용하고 불의를 일삼는다. 인종 차별이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인식되는 시절 편협한 배심원 재판에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욕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톰 로빈슨을 변론하는 애티커스의 용기는 잘못된 편견에 반대의 뜻을 분명히 보내는 항의 메시지이다. 거품을 입에 물고 마을 주민에게 돌진하는 미친 개를 한치의 망설임 없이 사살하는 행동 또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통찰력 있는 결단이다.

필자는 윤석열 정부 5년동안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사권을 동원한 협박이 무서워 결국 굴복을 선택한다면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한 개인·단체·계급·당파 따위가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라고 공권력이 주어진 게 아니다. 공권력은 공동체의 정의와 공익을 위해 한정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민주 선거로 뽑힌 지도자는 독재를 할 논리의 정당성이 없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 주고,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을 주지 않는 제도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게 된다면, 지금 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다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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