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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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유치원

2023-01-22 (일) 김지나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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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유치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유치원이라는 곳이 없었고 그 누구도 초등학교 이전에 다른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모르는데 부러움이 있을 수 없고 모르는데 미리 알려고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음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기껏 동네 어귀 뚝방길을 따라 동네 친구나 동네 코흘리개 동생 손을 잡고 이리저리 활개 치며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뚝방 모래길 옆으로 노랗고 붉은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중에서 하얗고 동그란 토끼풀은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으로 훌륭한 놀잇감이었다. 작은 국화꽃 모양을 한 토끼풀은 먼저 가느다란 줄기를 길게 꺾어야 한다. 하얀 국화꽃 머리 바로 아래 여린 줄기를 엄지손톱으로 조그맣게 금을 그어 반으로 가른 다음 또 다른 토끼풀 줄기 끝을 그 안으로 밀어 넣어 주욱~ 잡아당긴다. 그러면 토끼풀끼리 머리가 맞물린다. 붙은 토끼풀 머리 양 갈래로 난 줄기를 작은 손가락에 줄기 양 끝을 야무지게 묶고 남은 줄기를 이로 잘근 씹어 끊어내면 포동한 토끼풀 반지가 되고 팔목에 대면 하얗게 통통한 팔찌가 되었다.

팔찌처럼 토끼풀 머리를 연속으로 줄기 배를 갈라 머리를 그 안으로 디밀고 또 디미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주렁주렁 목에 걸 수 있는 목걸이가 되고 인내를 발휘해 여러 개를 합하면 아담한 꽃다발이 만들어지기도 해서 토끼풀의 변신은 무한적이었다.


그런 뚝방길을 짧은 다리로 뛰다 걷다 꽃반지 낀 동생의 손을 옆집 어른에게 인계하면 잘 데리고 놀았다며 간식거리로 요구르트나 눈깔(?) 사탕을 손에 쥐워 주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그리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의 뚝방길이 유치원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배움의 장소였다.

참, 다락방의 추억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일반 주택 구조상 뾰족한 지붕과 천장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빈 공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시절에도 그런 숨겨진 공간을 머리 좋은 한국 사람들이 그냥 비워 놓을 리 만무하다. 기준선도 모호한 벽은 쓰다 남은 꽃무늬 벽지를 발라 여기저기 구멍 투성이었고 삐걱대는 오래된 나무 바닥에는 흐트러진 낡은 전선줄이 얽혀 있었다. 아무렇게나 노출된 공간이 위험하기도 했을 터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낡고 오래된 공간이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만 5살에 가야 하는 유치원에는 못 가봤지만 50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어느새 어른 유치원인 시니어 센터에 등록할 수 있고 시니어로서 나라에서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시니어라는 말은 보통 학교에서 제일 높은 학년을 시니어라고 하고 사회에선 나이가 많은 연장자나 노인을 말하는데 특히 55+라는 사인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크게는 주택융자를 받을 때 할인된 금액이 적용되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고 적게는 맥도날드나 버거킹에서 음료나 커피를 할인된 가격으로 저렴하게 마실 수 있다.

그렇지만 시대가 급변해 의학의 발전과 식품의 변화로 예전의 55세는 0.8을 곱해야 상식적인 현재의 나이가 된다고 한다. 즉 55*0.8은 44세다. 시어머니를 지금의 내 나이에 처음 만났는데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던 게 사실이었고 친정엄마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50대는 3, 40대와 별반 차이가 없고 오히려 자녀들이 장성해 시간과 재력에 여유가 생기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자기계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외모뿐만 아니라 체력 또한 대단한 분들이 많다. 그래서 몇십 년 전의 55세가 시니어였다면 지금은 당연히 65세나 75세쯤이 시니어라고 해야 맞는 말인 듯싶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는 말이 무의식중에도 흘러나오고 돋보기를 끼지 않고 거울을 보면 아직은 시니어로 대접받는 나이는 아닐 거 같은 착각이 드는데 왜 이런 무지막지한 ‘시니어’라는 이름으로 주름진 굴레를 덧씌워 불리는 것인지 분통한 일이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이 있지만, 나이가 많아 받는 공짜는 그 무엇이든 절대 사절이라며 도망치고 싶고, 반대로 비싼 물건이지만 젊어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얼마가 되든 줄을 서서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돌고 도는 게 인생사라고 하는데 믿기지는 않지만 5살에서 단지 50번의 겨울을 거쳤을 뿐이데 벌써 두 번째 유치원에 갈 수 있는 시니어 그룹에 들어서 있다. 인생무상함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돌아보면 천금 같은 자식이라 동네에서 제일 좋다는 사립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새벽바람부터 줄 서 번호표를 받아 입학시키며 그렇게 기뻐했고 그런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몇 날 며칠을 울었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젠 그들 세대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가 되어 두 번째 유치원에 가야 한다니…, 이제부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숫자는 ‘55’가 되지 싶다.

<김지나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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