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국에서 TV에 방영되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본 기억이 어렴풋한데 다시금 미국에서 재방송으로 보게 되어, 사뭇 그때와는 다른 노년의 시각으로 이 대하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 극한 혼란기였던 구한말부터 건국초기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없는 토속적인 전원풍경과 등장인물 수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영상 또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 작가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쓴 대표 작품이다.
언뜻 스치는 생각으로는 마치 미국의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와 ‘토지’의 최서희 두 여주인공들이 대대로 내려오는 뿌리와 땅에 대한 강한 집착과 의지가 선구자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 같고, 양반과 상놈의 지위가 분명한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을 떠 올리게 하는 만석꾼 대 지주의 양반집 가족사이기도 하다.
대학교수로 한국에 오래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어느 미국인이 실토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한국 전통문화의 정수인 사극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방특유의 방언과 복잡한 호칭문화가 앞으로도 내가 이곳에서 공부해야 할 과제이다”라고.
호칭이야기가 나오니 나 역시 미국에서 몇 년 신혼시절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호칭문제가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지금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오빠야”라는 단어처럼 그 당시 생각 없이 시어머님 앞에서 “자기야”를 입에 달고 있었다. 하루는 참다못한 시어머님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하대하듯이 반말하면 안 된다고 예절을 중시하는 집안 어른으로 나무라시니 무안 정도가 아니었다. 하물며 종가 집으로 시집간 언니까지도 손사래를 치며 아연실색이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호칭이었는지 내 생각이 삐딱한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러시지 하며, 존칭 자체가 없는 미국사회에서 잠시나마 생활하며 주위 눈치 보지 않고 단 둘이 사용해 익숙해진 말이 주위 사람들이 듣기에는 불편하게 들리었나 싶었다.
하지만 한번 길들여진 말투를 고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 며느리가 우리와의 대화 가운데 “남편”이란 말을 자주 쓰기에, 듣기 좋고 말하기 쉬운 남편을 호칭 할 때 어른들 앞에서는 “애들 아버지”나 “애들 아빠”로 부르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느냐고 일러 주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님이 언뜻 연상되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시시때때로 나오는 고치기 힘든 고질병이 또 있다. 드물긴 하지만 오래 사귀어 친밀하다 싶으면, 또는 나이가 그다지 많지 않거나 아래다 싶으면 친근미를 전한다는 생각으로, 또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내고 싶다는 표현으로 슬그머니 평어를 섞어 대화를 하게 된다. 이런 말투가 친할 때는 상대가 개의치 않다가도, 어떤 벽 같은 틈이 생기면 그 말투에 꼬리를 잡아 시시콜콜 사이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인지 한결 같이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일찍부터 습관이 된 말 뒤끝에 존대어를 붙이는 사람들을 보면 경이로운 생각마저 든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도 갚는다는데, 좋은 의미로 시작된 말투가 오히려 오해의 여지로 남는다면 복잡하고 헷갈리는 말끝에 “…요”라는 존대어를 쓰는 것이 더 쉬울 것도 같은데, 버릇이란 참 고치기 어려운가 보다.
돌아보니 아가씨, 새댁, 그리고 아주머니를 거쳐 검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나이로 접어드니 자연스럽게 할머니로, 세월 따라 호칭도 다르게 따라다닌다. 이렇듯 나이에 따라 다르게 불러지는 호칭들이 때로는 갖가지 무수한 사연들을 담은 추억 속의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듯, 모든 호칭들이 그저 정겹게만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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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