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아침, 이너 하버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베이 동쪽 하늘이 떠오르는 햇빛으로 붉게 물들 무렵, 러닝 슈트를 입은 사람들의 입김이 차가운 아침공기 속으로 하얗게 퍼져 올라간다.
2019년 10월 둘째 일요일 7시. 내가 볼티모어 풀 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2-3만 이상 되는 러너들과 함께 스타팅 라인에 서서 꽤나 긴장도 되고 흥분도 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2003년이 끝날 즈음에 어린 아들과 아내. 이렇게 셋이서 일가친척은 커녕 친구 하나 없는 이 낯선 미국 땅에 무모(혹은 무책임)할 정도의 도전 정신으로 이민을 감행했다.
도착 후 3주가 지나고 부터 삶을 위해 시작한 이민자로서의 생활은 훌쩍 15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었고 어느새 60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10여년을 워싱턴 DC로 출퇴근 하고 있었는데, 여러 노선 중에 Rock creek parkway라는 길이 있어 그곳을 운전하다 보면 마치 셰넌도어(Shenandoah)의 깊은 산중을 달리는 느낌이 들며, 한쪽에 갖추어진 트레일엔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뛰는 모습이 정말 한가롭기도 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해서 언제 부턴가 부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저렇게 달려보며 진정한 미국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누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미국에 온 이유이기도 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일보에 난 짧은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마라톤 동호회가 센테니얼 파크(Centennial park)라는 곳에서 매주 일요일 아침에 러닝활동을 하고 있다기에 2019년 3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그곳에 스스로 찾아가 동호회 일원이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 체육시간에 달려본 것 말고는 달려본 적도 없고 100미터만 달려도 숨이 차 죽을 것만 같아 싫어했던 종목을, 그것도 마라톤을 이 나이에 해보겠다고 갔으니 과히 또 다른 무모한 도전이라 하겠다.
센테니얼 공원엔 일요 새벽이면 평균 나이 60을 넘긴 한국인 남녀들이 십수 년을 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며 건강과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보스턴 마라톤대회를 다녀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50을 훌쩍 넘긴 어느 여성분은 한인 최초 철인 3종을 완주할 정도로 그 하는 모양이 보통 수준을 넘는다.
긴장을 풀어주며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켜 주던 요란한 음악 사이로 진행자의 멘트로 조용해지더니, 미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마침내 출발의 총성과 함께 수많은 러너들의 행렬이 볼티모어의 시내를 가득 메우고 그 안에 나도 거친 숨을 내쉬며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연도에 많은 시민들이 나와 방울을 딸랑거리거나 환호하는가 하면 어느 마을을 지날 때면 음료뿐만 아니라 맥주까지 건네주며 응원해주는데, 마치 올림픽 대표로 뛰는 기분이다.
입문한지 7개월 만에 26.219마일, 42.195킬로미터의 우리 집 콜럼비아에서 DC 다운타운까지의 거리를 뛰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나요? 보통은 시작하고 일 년이나 지나야 5K, 10K Half 그 다음에 겨우 일부만 풀 마라톤을 도전해보려는 게 일반적이다.
동호회와 조인하고 나서 호숫가 한 바퀴를 걷거나 뛰기를 반복하다 차츰 거리를 늘려가는 중, 여름이 지날 무렵 대회에 한번 나가볼까 하는 나의 무모한 도전이 도발하였고 그렇게 해서 지금 이 엄청난 군중 속에 갇혀 어딘가로 이끌려 가고 있는 것이다.
20마일 지점에서부턴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해서 뛸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우리 팀의 여자선수 중 한 명이 “쥐날 때는 핀으로 찌르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 생각나 빈 넘버를 고정시킨 옷핀을 빼 허벅지를 찌르며 걷다 뛰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피니쉬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고 연도에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갈채를 받으니 갑자가 감정에 북 받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해냈다”, “5시간 1분.”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우리 집엔 아홉 개의 메달이 장식되어 있다. 교통사고로 손과 발이 부셔지는 부상도 있었고 코비드로 대회에 나갈 수 없는 상황도 있는 것을 고려하면 꽤나 많은 메달 수집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우리 팀 중에 가장 꼴찌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이야기 할 때 마라톤과 비교해 말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 나도 굳이 내 인생을 마라톤에 비한다면,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멀고도 순탄치 만은 않았으며, 분기점을 지나 앞으로 남은 피니쉬 라인까지도 쥐가 나고 쓰러진다 할지언정 마라톤의 정신으로 포기치 않고 반드시 완주하여 환호와 갈채를 받는 인생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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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국 / 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