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다 지나간다. 이 칼럼이 이번 해의 마지막 글이다. 본보에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게 2010년 8월이니 이제 12년이 넘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오랫동안 읽어 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면서 새해에도 계속 쓸 수 있도록 응원을 부탁해 본다. 독자들에게도 연말연시에 좋은 일이 많이 있고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내일은 크리스마스 이브, 그리고 모레는 크리스마스로 왠지 마음이 설레는 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탄생처럼 중요한 한 생명의 등장도 없을 것이다. 말구유에서의 작은 시작이 지난 이천년 뿐 아니라 인간 역사 전체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처럼 나도 한 생명의 존재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한 적이 없다. 지난 주말에 첫 손주와 만남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한 주 밖에 되지 않아 내가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먼 길을 달려가 하룻밤 밖에 같이 보내지 못했지만 새 생명이 가져다 주는 흥분과 희망만큼 소중한 것도 없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이렇게 작은 인간이 있구나 하고 새삼 놀라워 하며 무력한 한 작은 생명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어야 가능한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 하나하나 이렇게 많는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 오늘의 모습에 다다랐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새해에도 진심으로 주위 사람들을 대해야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런데 요즈음 생명의 존재에 대한 생각에서 나에게 서글픔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이다. 그 누구보다도 좋다고 여겼던 아버지 건강의 급격한 변화는 내가 가까운 한 생명과의 헤어짐에 대해 얼마나 준비가 안 되어 있나를 일깨워 준다. 10년 전 쯤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렸던 경험만 가지고는 턱 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또한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건강했기에 주위에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돕는 낙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제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고, 건강도 잃어 도움도 못 준다. 그리고 예전에 알던 친구들도 거의 다 먼저 세상을 떠난 시점이 되다 보니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멀리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이 곳에 와 있는 여동생을 통해서 들었다. 내가 직접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해 본다.
그런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는 ‘삶의 의미’는 사실 나도 얼마 전서부터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다. 나도 올해메디케어 카드 소유자가 되었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노인’ 층에 들어선 것이다. 언제가 적절한 은퇴 시점인지, 그리고 은퇴한다면 내 인생의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 게 가장 적절할지도 고민해 본다.
얼마 전 공개된 자리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세가 지 ‘T’들, 즉 Treasure (재물)과 Talent (재능) 그리고 Time (시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재물에 있어서는 그다지 내세울 게 없다. 그러나 재능에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것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가장 ‘선한’ 사용일까에 대해 자문해 본다. 그리고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가장 보람될까도 함께 고민해 본다.
2019년 말로 25년간의 겸직 공직생활에서 은퇴하고 난 후 보냈던 지난 3년간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과 재능 사용에 대한 평가를 해 본다. 팬데믹 상황이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과연 만족스러운가. 또한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후회가 없겠나.
새로 태어난 어린 생명의 얼굴을 지난 주말에 찬찬히 바라보면서 그 아이가 자랄 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를 물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 이 세상에서 헤어질 때까지 할아버지인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고 기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를 마음 속으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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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