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어느 대학의 교수가 학생들이 한자(漢字)를 너무 몰라 놀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한자도 한자지만 우리말도 잘 모른다며 어떤 학생이 “골목이 무슨 말이냐?”고 묻더라고 했다. ‘오징어게임’의 골목놀이 때문에 나온 질문이라고 한다. 세상에 골목을 몰라!
골목을 모르면 골목길, 골목대장 이런 것도 모르겠지. 골목을 모른다는 건 어려서부터 골목이 없는 아파트에만 살아왔다는 거다. 골목이 없는 동네는 추억이 없는 동네다. 골목에서 소꿉놀이,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병정놀이, 공기놀이 하며 놀던 동무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여러가지 놀이를 하면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공간과 날이 새고 날이 지던 시간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삶은 안쓰럽고 안타깝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본 경험이 있어야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텐데.
골목 중에 가장 좋은 골목은 먹자골목이다. 허기진 귀갓길에 지나가면 고기냄새로 가득하다. 옛날에 무교동 낙지골목을 지나가면 낚지 볶는 냄새가 진동했다. 소주가 땡기고 인심이 살아있는 멋진 길이었다. 타는 냄새가 분명한데 달콤하게 느껴진다. 고약한 냄새가 아니고 감칠맛 냄새다. 사람 냄새가 나고 웃음꽃이 피는 길이었다. 개성없고 재미없는 탄탄대로보다 가로등은 없어도 가게 불빛으로 훤한 작은 먹자골목이 좋았다.
겨울밤에 특별히 떠오르는 골목도 있다. 추운 늦은 밤 골목 어귀에서 ‘찹싸아알 떡! 메미이일 묵!'하며 지나가는 찹쌀떡 장수의 소리를 듣고 입맛만 다셨던 아련한 추억의 골목이다. 언젠가부터 겨울 밤바람과 함께 사라진 정겹고 구수한 목소리가 있던 그 골목이 그립다.
골목길 노래를 불러 히트 시킨 가수들도 있다. 1985년에 발표된 DJ출신 가수 이재민의 데뷔곡인 ‘골목길’은 마치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의 추모곡처럼 들린다.
“오늘밤은 너무 깜깜해/별도 달도 모두 숨어 버렸어/니가 오는 길목에 나 혼자 서 있네/혼자 있는 이길이 난 정말 싫어/찬바람이 불어서 난 더욱 싫어/기다림에 지쳐 눈물이 핑도네/이제 올 시간이 된것도 같은데/이제 네 모습이 보일것도 같은데/혼자 있는 이길은 아직도 쓸쓸해/골목길에서 널 기다리네/아무도 없는 쓸쓸한 골목길”
1989년 김현식이 신촌블루스에 합류해 부른 ‘골목길’은 청춘남녀의 가슴을 애태우고 설레게 한다.
“골목길 접어 들 때에/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수줍은 너의 얼굴이 창을 열고 볼 것만 같아/마음을 조이면서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만나면 아무말 못하고서/헤어지면 아쉬워 가슴 태우네/“이하 생략.
상상조차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골목도 있다. 매일 뉴스에서 듣는 용산구 이태원 골목이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대형 참사가 10월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 호텔 인근 좁은 비탈길 골목길에서 일어났다. 이번 참사가 우리를 정말 비참하게 한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참사가 21세기 서울 한복판 골목길에서 일어났는지 잘 납득이 안된다. 모두가 자숙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참사가 발생한 골목은 언제나 젊음의 활력이 흐르는 통로로 인기가 있었던 장소였는데, 지금은 추모 공간이 되어 있다. 추운 날씨에도 추모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하얀 국화가 시들 때쯤이면 누군가 다시 가져온 새 국화로 채워진다. 벽에는 추모의 글을 적은 포스트잇(Post-it) 메모지가 붙일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붙어 있다.
상처받은 조개가 진주를 품듯, 추모의 시간과 분노의 시간이 충분히 흐른 후 다시 젊음의 활력이 흐르고 포옹도 하고 손잡고 걷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골목길로 재탄생 해야 한다. 더 이상 꼬불꼬불한 죽음의 막다른 길이 아닌 사랑이 흐르고 인정이 넘치는 설렘과 소통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제의 슬픔을 극복하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핏줄과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한다. 움츠림을 거두고 시간날 때 다시 찾아가는 생명의 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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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모 / 워싱턴산악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