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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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의‘미국 들여다보기’(66)

2022-12-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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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역과 번역

집에서 아기를 돌보던 엄마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기어 다니던 아기가 수영장에 빠져 익사했다. 오래전 미국 서부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아기 엄마가 뭔가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넋이 나간 아기 엄마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경찰이 현장 주위의 한인에게 “저 사람 지금 뭐라는 거예요?”하고 물어본 모양이고, 이때 누군가가 ‘I killed… I killed…’라고 통역했나 보다. 경찰은 그 즉시 아기 엄마를 살인죄로 체포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고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엄마가 말한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는 범죄의 자백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엄청난 자책이다. 영어의 “I killed…”와는 전혀 다른 뜻이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렇게 통역하는 바람에 사달이 난 것이다.
이 엄마가 말한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의 진의가 재판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법관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 지역 한인사회가 나서서 우리 문화에서 그런 말이 갖는 뜻을 설명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법원에 넣기도 했다.

법과 관계되는 일에서는 즉문 즉답하듯이 통역하는 것은 위험하다. 법전에서 볼 수 있는 ‘정당한 이유 없이 OOO 해서는 아니 된다’와 ‘부당하게 OOO 해서는 아니 된다’는 그게 그것 같아 보이지만 입증책임이라는 면에서는 정반대의 뜻이다. 법에서는 ‘아’ 다르고 ‘어’가 다르다. 통역이나 번역이 법과 관계되어서는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조심해야 한다. 친한 사이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너 이제 죽었어.”, “너 죽고 싶어?”, “너 그러다가 죽는다.”, “어쭈? 죽을래?”, “그렇게 까불다가는 죽는 수가 있어.”


우리는 이런 말들에서 살기나 살의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한인 고등학생들 사이에 조금 심한 장난이 있어서 화가 난 학생이 앞에 예를 든 것 중 하나를 말했다고 하자. 그걸 옆에 있던 미국 학생이 “쟤 뭐라니?”라고 물어봤을 때 “I will kill you.”라고 통역했다면 그 말 때문에 경찰이 출동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번역 이야기. 영어에 drag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보통 ‘용(龍)’이라고 번역한다. 그 번역에 불만이 있다. dragon은 ‘용’이 아니다. 다른 명사를 만들어내든지 그냥 ‘드래곤’이라고 적어야 한다. dragon은 대개 공룡의 모습이고 커다란 날개가 달려있어서 하늘을 날고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 인간과는 대개 적대적이고 악을 상징하는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용’은 여러 동물의 모양을 모은 모습이고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난다. 무엇보다도 용은 상서로운 존재이다. 그러니 dragon과 용은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dragon을 용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렇게 번역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번역가에게 많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살면서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게 되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2의 창작’ 정도가 아니라 ‘번역은 곧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황량’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번역에 관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짙은 구름이 낀 어느 겨울날의 들판에서 느끼는 ‘황량’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가슴에 남은 ‘황량’은 한글과 한자로는 같지만 영어로는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는 그런 글이었다. 다른 언어체계 사이에서 잘 만들어진 문장과 적절히 선택된 단어로 이루어진 번역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1975년에 발표된 미국 영화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의 번역을 생각해보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가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처음에 나오는 One은 ‘사람’일까 ‘새’일까? One을 직접 번역하지 않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가다’라는 번역을 가장 좋아한다. 문장 속 모든 단어를 일일이 다 번역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번역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좋아하는 번역 두 가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부분에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대사가 있다. 일상생활에서 아침 출근길에 만난 동료들끼리 ‘another day’라고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로 번역되었다. 참 멋진 번역이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인데 이에 관한 여러 가지 번역이 있지만 오역으로 알려진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가 더 좋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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