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일원에서 동네이름 예쁘기로는 단연 몽고메리 카운티의 실버 스프링(Siver Spring)이다. 은빛 샘. 은여울,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운모 비늘이 햇빛에 반사되는 맑은 샘물을 발견하고 그 이름을 붙인 이는 공화당의 산파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Francis Preston Blair)다. 켄터키 출신의 언론사주인데 남북전쟁 전후로 미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친 블레어 가문의 중시조다. 블레어네가 살던 집이 현재 백악관 옆의 대통령 영빈관 블레어 하우스다.
쪄죽을 것 같은 워싱턴 시내의 무더위를 피해 1840년 딸을 대동하고 여름별장 자리를 둘러보던 블레어의 눈에 이 샘이 들어왔다. 그 자리에 방 스무개 짜리 저택을 짓고 일대를 실버 스프링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실버 스프링 번화가 큰 길 사이의 도토리 공원(Acorn Park) 안에 그 흔적이 있다.
바둑판처럼 단정한 지금의 시가를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데 워싱턴은 강가의 뻘밭 습지에 세운 탓에 습한 무더위로 외교관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아래로 동남부 대서양 연안이 대개 그렇다. 같은 온도라고 해도 습기가 낮아서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살 것 같은 서부와는 다르다.
그러니 숲이 우거진 외곽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무더위를 피하는 것이 상류층의 상징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들 사이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현장도 그런 여름 피서지로 개발된 곳이다.
링컨은 백악관에서 제법 떨어져 언덕 진 숲에 있는 아담한 별장에서 한여름의 열기와 정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했다. 거기서 백악관으로 출근을 했는데 그 큰 키에 높은 모자(top hat)을 쓰고 말을 탄 인상적인 모습을 백악관 근처에 살던 시인 월트 휘트먼이 묘사해 뉴욕 타임스에 기고하기도 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에서 인용되는 그의 시 ‘오 캡틴, 마이 캡틴(O Captain, My Captain)’은 피부에 닿고 폐부에서 우러나온 외침이었던 것이다.
블레어 집안은 쟁쟁한 정계의 인물들을 배출했다. 그중에도 당시 역할이 컸던 우정장관으로 링컨 내각의 핵심이었던 몽고메리 블레어가 특히 유명하다. 몽고메리 카운티의 명문 영재고등학교가 그의 이름을 따고 있다. 블레어는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2012년)에도 등장한다. 유명한 스캇 재판의 변호사로 활약한 블레어는 당장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공화당내 급진파에 밀려 사퇴하지만 링컨의 재선 가도에 큰 역할을 한 최측근이었다.
실버 스프링은 워싱턴의 한인 커뮤니티에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다. 본격 이민이 시작된 70년대 초 메릴랜드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 랜도버의 아파트 단지 켄트 빌리지가 뿌리였다면 그들이 자리를 잡고 내집을 마련하여 꿈나무를 키운 곳이 그보다 나은 동네 실버 스프링이었다. 지금도 실버 스프링의 유니버시티 블러버드를 지나가다 보면 한글 간판이 적힌 정부 노인 아파트를 볼 수 있다. 이 글을 쓰다보니 인터넷도 없던 시절 실버 스프링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소년처럼 좋아하시던 전 한인회 부회장 정갑진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편 실버 스프링 일대의 교통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슬라이고 크릭(Sligo Creek)은 아이리쉬 이민자들과 관계가 있다. 19세기 중반 C&O 운하 공사를 하던 아이리쉬 이민 노동자들이 콜스빌 로드와 조지아 애비뉴가 만나는 갈림길이 두고 온 고향 슬라이고의 풍광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