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에 ‘설국열차’와 ‘부산행’이 있다. 두 영화는 열차를 배경으로 하는 것과 위기속에서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는가를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 설국열차는 온통 빙하로 덮인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18년동안 달리는 열차안의 이야기이다. 그 열차의 맨 끝 칸 안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열차 첫 번째 칸에는 모든 열차 칸을 조절하고 지배하는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와 사회의 불균형된 격차를 비쳐준다.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것처럼 그 열차안에의 세계도 그렇게 맨 끝과 처음 칸의 삶의 세계가 달랐다. 이런 열차안에서의 현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열차 칸을 하나하나씩 점령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꿈꾸는 것들을 이루어 간다. 하지만 그 열차는 기계 고장으로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고 그 기차는 폭발하게 된다. 결국 그 기차안 에서는 더 살 수 없게 되어 그 기차는 폭발하게 되고 결국 그 기차밖으로 탈출했을 때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되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하고 차별과 구별이 있는 열차같은 계급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부조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부조화는 될 수 있다. 세상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모르는 것들도 많고, 누리는 것보다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을 수 있다. 가난의 원인도 모르고, 또 부자의 책임도 모르는 채 그냥 이 세상은 달리는 열차처럼 그냥 달리고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 찾고, 빼앗고, 죽이고, 간절히 원하지만 사실 사람의 최종적인 해답은 열차 안이 아니라 열차 밖에 있었던 것이다.
행복과 자유는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빠져나가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내 안에 갇힌 그 곳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더 넓은 세상의 행복한 광경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은 바나나라고 세뇌받은 노래에서 탈출하고 다른 맛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부산행은 열차 안에 좀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전염시키는 가운데 서로 살기 위해 싸우다가 결국 부산에 다 도착하지 못하고 중간에 열차는 멈추어 서게 된다. 많은 사람이 죽는 가운에 단 두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모두가 다 함께 한 곳에서 죽음의 위험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누구나가 죽음을 무서워한다. 죽음의 위기나 위험 속에서 자신보다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부산행의 석우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배고프면 내가 먼저 빵 한 조각을 나 몰래 먹는 것은 자연적이다. 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누가 남을 생각해 줄 것인가? 지금 우리는 나먼저 생각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다. 나라도 자국의 이익을 찾아야 하고, 기업도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
그러나 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나도 힘들지만 최소한 다른 사람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내 눈높이에서 보는 시각보다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힘든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내가 가진 조금의 물이라도 건네주는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어려운 부산행 열차를 타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 다같이 구출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살려주려고 했을 때 결국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끝까지 우리 모두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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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