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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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2022-11-14 (월)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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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산을 낀 공원을 가끔 걷는다. 요즈음 한창 숲을 버리고 있는 산에서 하늘은 더 높고 투명하게 보이고 기러기와 예쁜 새들을 안고 있는 호수는 더 가까와졌다. 기울어가는 가을햇빛에 산등성이 억새들은 은빛으로 기품있게 물결치고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융단처럼 밟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아스팔트 길로 굴러다니는 낙엽 소리에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고 서글픔이 밀려온다.

영원할 것처럼 울창했던 나뭇잎들이 오색으로 치장하다가 벌레와 바람에 시달리고 말라서 우수수 떨어지고 산은 조금씩 여위어 간다. 혈기 넘치고 예뻤던 젊은 날의 모습이 석양에 물들어가고 산은 그렇게 단출한 모습으로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뼈대만 남아가는 민산은 숲의 기쁨보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준다.

삶에만 고정되었던 시선이 죽음으로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인생무상, 허무함과 동시에 가을산은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집착과 욕망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스승이 되고 있다. 가식이나 숨김없이 다 떨쳐버림으로써 다시 충만해지는 가을 산, 진실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생은 이른 아침 풀잎끝에 맺힌 이슬과 같고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의 삶이다. 핼로윈 축제로 젊은이들이 핼로윈 분장을 하고 들떠서 나갔다가 참사로 인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아침에 학교갔던 어린이가 유괴되어 행방불명이 되고, 다리를 건너다 그 다리가 무너져 목숨을 잃고, 조깅하던 아가씨가 괴한에게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해 쓰레기로 버려지고, 직장동료에게 원한을 품은 총으로 얼떨결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등 세상에는 아침 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되는 일이 너무 많다.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내일 보려던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다. 내일하려던 백가지의 일보다 지금 막 끝낸 한 가지 일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불투명한 우리의 삶 속에서 내일을 기대하는 것보다 현재를 더 소중히 간직하고, 하고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바로 하는 게 후회없는 삶이 될 것같다. 한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겨서 내일보다 현재에 충실한 생활이 더 현명할 것같은 생각마저 든다.

마음이 힘들고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곡이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은 아다지오로 우울하고 애잔한 선율이 흐르면서 가슴이 뭉클하다가 반전 분위기로 곡이 환상의 날개로 피어오르듯 하면서 우아하고 의연하게 슬픔을 가라앉히는 아름다움이 있다. 흩날리는 낙엽을 보면서 귀에 들리는 ‘비창소나타’가 유난히 장엄하고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가을은 맑은 인연이 더욱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모락모락 차 한잔 마주하고 맑은 하늘빛 공기 아래 눈으로만 미소지어도 우리 가슴 속의 싸늘함이 녹여지고 따스해 질 것같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세계를 가꾸면서 살지만, 우리 공동체의 삶 속에는 불문율처럼 공존의 철학이 존재 한다.

우리 선조들은 밭에 콩을 심을 때 그 자리에 세 알씩 뿌렸다고 한다. 하나는 새에게, 또 하나는 벌레에게, 나머지 하나는 싹을 틔워서 사람이 먹었다고 들었다. 서로 나누어 먹는 정겨운 삶, 얼마나 따뜻하고 인간적인 마음가짐인가.

또한 아무리 배가 고파도 늦가을엔 감나무에 연주홍 감을 몇 개 남겨서 까치나 겨울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까치밥’을 남겼다고 한다. 각박한 세상 이지만 머나먼 인생 길을 가는 우리에게 서러움을 달래줄 따뜻한 등불같은 까치밥….
매서운 추위, 눈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는 새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배려, 훈훈한 정이 비어가는 가을하늘을 채우고 있다. 가을산이 충만해져가고 있다.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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