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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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의‘미국 들여다보기’(57)

2022-10-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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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을 하는 타인종 사람들

“천만에요.” 이 한 마디가 20여 년 전 미국에 도착한 후 한인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처음으로 들은 우리말이었다. 운전면허증 발급 때문에 차량국(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에 갔을 때인데 일을 마친 후 창구의 담당자에게 고맙다고 “Thank you’.”라고 말했더니 창구에 있던 백인 중년 여성이 그렇게 대답했다. 신기했다. 우리말을 하는 외국인이 있다니… 그날은 그랬다. 운전면허 때문에 따라나섰다는 것 자체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더 신기했던 것은 실상 우리는 잘 사용하지 않는 ‘천만에요’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주위의 한인에게 “일하다 보면 가끔 한인을 만나게 되는데 ‘You are welcome.’을 한국말로 뭐라고 해?”라고 질문했을 것이고 ‘천만에요’라는 대답을 들은 까닭이라고 짐작했다.

근무했던 한인이 운영하는 식품 도매상에는 몇 년 선임이 되는 몽고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우리말을 곧잘 했기에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그 식품 도매상 대표가 한인이기도 했지만 주된 고객이 한인이다 보니 직원 중에 한인이 많은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청년이 하는 우리말에서 퍽 재미있는 점이 발견되었다. 상대방이 반말로 말을 하면 반말로 대답하고 상대방이 높임말로 말을 하면 높임말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밥 먹었어?”라고 물어보면 “어, 밥 먹었어.”라고 대답하고, “밥 먹었어요?”라고 물어보면 “예, 밥 먹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우리말에 높임말이 있다는 것과 문장의 끝에 ‘요’를 붙이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상대방이 ‘요’를 붙이지 않으면 마치 우리말이 서툰 사람인양 ‘요’를 붙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받는 대로 돌려주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와 그 부근의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에는 퍽 많은 한인이 살고 있고 자영업을 하는 한인이 많기에 그 업소에서 일하는 중남미 사람들도 많다. 그들도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 정도의 간단한 우리말을 할 줄 아는데 그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빨리빨리’가 아닌가 싶다.
한 번은 아프리카 대륙 서쪽의 시에라리온(Sierra Leone) 출신의 중년 남성과 함께 일했는데 서울에서 몇 년 취업한 경험이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약간의 우리말을 할 줄 알았는데 한가한 시간에 눈이 마주치게 되면 웃으면서 ‘오늘 소주 마셔?’라는 말을 건넸다.


지금 살고 있는 버지니아 북부의 페어팩스 지역에는 군인과 군속이 많이 산다. 가까이에 국방부(속칭 펜타곤)가 있고, 군 기지도 있고 커다란 군병원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방은 미국 땅 국경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나먼 해외에서 시작하기에 군인이나 군속의 해외 근무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들은 ‘이태원’, ‘용산’, ‘오산’, ‘평택’, ‘판문점’ 등 지명을 언급한다.

패어팩스 지역에 한인이 많이 살다 보니 직장 동료 중에는 자기가 아는 다른 한인에게 말해주기 위해 “ooo는 어떻게 말하는 거야?”하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새해가 되면 “미스터 킴, ‘해피 뉴 이어’는 한국말로 어떻게 말해?”라고 물어오기도 한다. “아… 그거 쉽지 않은데… 보통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해.”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슷하게 따라 해 보다가 곧 포기하고 만다. ‘해피 뉴 이어’에 비해 길기도 하고 발음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만도 대단하다. 페어팩스가 그런 곳이다.

고국의 TV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노동자나 국제결혼한 부부가 출연한 것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하는 우리말을 들어보면 잘 하기는 해도 약간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들이 하는 우리말과 미국 땅에 살면서 내가 하는 영어를 비교해 보고는 ‘저들이 하는 우리말이나 내가 하는 영어나…’라는 생각을 한다. 원어민만큼 말을 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원어민과 이민자의 그 지역 언어 사용에는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외국인이 ‘마트에 쥐약 사러 간다.’라고 얘기하더라도 우리는 ‘쥐약’이 아니라 ‘치약’을 사러 간다고 알아듣는다. 그렇듯이 내가 버벅대며 영어를 한다고 해도 이 지역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영어를 일단 시작한다. 생긴 모습이 이 지역 토박이하고 다르기 때문에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를 보면서 ‘이 사람, 영어를 할 줄 알기는 하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생긴 것으로 일단 기본 점수를 먼저 확보하고 들어가는 셈이다. 그래서 ‘영어, 잘하면 좋겠지. 하지만 이민 1세대의 한계를 어떻게 하겠어. 좀 못해도 괜찮아…’라는 근거 없는 엉터리 배짱으로 이 미국 땅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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