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의 더위도 그늘에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하던 7월 말 오후. 잘 다듬어진 넓은 잔디밭 가운데 편안히 자리잡은 정자 밑에 나는 손님으로 앉아 있었다. 정자는 결혼식장 답게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핑크색 꽃다발로 가볍게 허리띠를 두른 네기둥은 하얀색 망사천을 넉넉히 두르고, 간간히 불어오는 솔바람은 그 치마 끝을 들치며 속살을 곁눈질 하듯 주춤주춤 서성거리고 있었다. 볼품없던 쇠 의자들도 그날은 흰옷으로 가지런히 옷을 입었다. 카메라를 메고 분주한 젊은 여자를 제외하면 띄엄띄엄 자리를 메꾸고 있던 손님들은 모두 흰머리의 노인들뿐이었다.
두 목사님이 단상 앞에서 신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입장을 알리는 음악에 맞추어 수줍은 듯 고개숙인 절뚝거리는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살갗이 비추도록 얇은 천의 하얀 드레스가 가볍게 떨리었다. 신부의 팔을 잡고 발길을 돕는 중년남자는 어머니의 가냘픈 몸매를 듬직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축복된 장소에 함께해주신 손님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로 시작된 그 예식은 신부의 두 아들 목사의 기도로 계속되었다. 두 아들은 번갈아 가며 어머니 결혼식을 진행하였다. 10여년 전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혼자 사는 노인 어머니를 먼 거리에서 위로 하기엔 무척 사랑스런 부담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조심스레 남자친구가 생긴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그분은 고장난 수도 꼭지도 고쳐주고 산더미처럼 쌓인 눈도 치워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은 기다리던 잔치날이었다. 어머니가 시집가는 날이다. 새 아버지도 맞이 하는 날이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생긴 날이다. 중년의 자식들이 할머니, 어머니의 결혼식에 참석해도 껄끄럽지 않은 날이다. 예전부터 고집하던 관습이나 관념에서 자유를 찾은 날이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신나는 날도 만난다.
옆에 있는 건물에 준비된 리셉션장에는 천장에 수없이 달린 조그만 전등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흰 테이블마다 가지런히 앉은 난쟁이 꽃병은 검소하지만 초췌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망치로 천장과 “테이블을 치는 듯한 드럼통의 소란함이 없어서 더 좋았다. 무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에 맞추어 신부와 신랑의 춤으로 막을 올렸다. 곧이어 아들 하나씩 덩실덩실 어머니 신부와 함께 춤을 추는 무도의 순서가 있었다. 계속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옛 노래가 듣는 이들의 가슴에 편안히 다가왔다. 큰아들은 목사이면서 파타임 직업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란다. 눈을 감으면 깜짝 속을 만큼 그의 노래는 엘비스 프레슬리다. 그날은 예외가 많은 날이었다.
75세 나이에 다이아나는 매주 나하고 테니스 치는 친구이다. 늘 조용하고 웃음이 적은 그녀는 다른 주에 사는 세 아들 이야기를 가끔씩 들려주곤 하였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그들 옆으로 이사오라고 졸라댔단다. 그녀는 아이들 옆으로 이사가지 않겠다고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조용한 성품속에 도사리는 옹골진 독립성이 엿보였다. 자신의 삶과 행복은 자신의 결정이지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겠다는 여인의 뚝심, 나는 그녀에게서 또다른 삶의 모습을 보았다. 70중반의 나이가 어디가 어때?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불타는 사랑이 있다면 결혼하는 것이지. 그것은 사회도, 이웃도, 가족도 막을 일이 아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그늘진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여자들의 삶에 인색했던 지난날의 한국사회, 외부의 날카로운 시선과 관습은 할머니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25살에 딸 하나를 낳고 과부가 되어 70년을 가난에 시달리며 외롭게 살아간 한국 여인, 나의 할머니. 시대와 장소가 만들어낸 아픔. 그날 나는 한없이 즐거웠다. 선택할 자유를 허용한 시대와 공간속에 산다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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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 인디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