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로 가는 길이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온라인예배에 익숙해지고 게을러져서 일요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기가 힘들다.
눈 비비며 차창문을 활짝 열고 시골 동네길을 천천히 지나고 있다. 길 옆 저 멀리 조그만 언덕 아래 짙은 구름을 뚫고 지평선 어디쯤에서 하늘로 서서히 올라오는 붉은 태양의 한 줄기 빛이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반사되어 뿌옇게 된 초원, 그 곳에 꼬리털을 흔들며 풀을 뜯고있는 다섯 말들에게 비춰지며 어슴프레 펼쳐지는 실루엣이 정말 환상적이다.
나무숲으로 거무스름하게 병풍을 친 바로 아래 두 아기사슴과 엄마가 하얀 울타리가 필요 없을 듯 차들이 다니든 말든 자유롭게 말들과 어우러져 아침을 즐기고 있는 정경 또한 너무도 평화롭다. 따스한 행복이 감돈다.
널따란 평원을 서 너개 지나면 누런 수염을 달고 녹색에서 황금빛으로 새 단장하는 옥수수 울타리가 세 블락을 이어가고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타고 간간이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새벽부터 일어나 아름다운 자연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9월이 지나니 뜨거웠던 여름 정열은 식어가고 들녘은 그 속에서 말없이 오색으로 예쁘게 피고 지던 들꽃조차 가을색으로 물들고 있다. 자연 만물의 숨소리, 영혼의 그림자도 겸허해간다. 조용히 나를 들여다 보는 시간, 은밀한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삶의 무게와 깊이를 헤아리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겸손히 고개 숙인 벼이삭처럼 사랑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진다.
또 한 계절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계를 극복하라고 하시는 목사의 아침설교가 계절이 가고 한 해가 지나도 전혀 발전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가려진 나의 담을 허물고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 라는 기도를 드리며 언젠가 ’케이티 데이비스’ 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생각한다. “한 때 누렸던 안락한 삶보다 누군가의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일이 훨씬 기분 좋았다. 이곳에 머무를수록 불편은 잠시이고 만족함은 더 깊고 오래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많은 패러독스, 힘든 상황, 지독한 외로움 그런게 마를 때쯤에 또 다시 흘러 내리는 눈물이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 한가지 확신이 단단히 뿌리를 내렸기에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 뜻안에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기도했고 그 때마다 신의 분명한 음성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했다.” 20대 초반의 그녀는 풍족한 환경과 보장된 미래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택했다.
잘생긴 남자친구와 스포츠 카를 즐기며 부러울 게 없던 예쁜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여름방학때 삼 주간 우간다 고아원에서 봉사 하다가 고향인 미국 테네시로 돌아온 후 아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려 대학도 포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거대한 사랑이 꿈틀거렸고 다시 돌아가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라고 울먹이는 5살 아이로부터 예수님의 눈믈을 보고나서 13명 딸들의 엄마가 되고 나아가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400명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된다.
그녀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인생의 밤이 길고 상처가 깊을 때 진짜 인생에 눈을 떳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을 조율해야 할 때이다. ‘엄마’라는 말은 사랑, 믿음, 보호, 교육, 함께 웃고 울며 포용하는 의미를 내포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까?
케이티는 그 동네 모든 사람에게서 엄마라 불려지며 자신이 창조된 본래의 목적을 이루며 살았다.
러시아의 영화 감독인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마음속에 사랑이 샘솟지 않는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라고 했다.
사랑이 있건 없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요구에 응답할 줄 아는 존재, 자기가 목적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이웃사랑이 아닐까? 만물이 사랑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요즈음, 움켜진 손과 마음을 펴고 진정한 행복, 영원한 기쁨을 잡은 케이티 데이비스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