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불로(深藏不露)
2022-09-15 (목)
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즉위한 뒤 정사는 보지 않고 매일 향락을 일삼으며 간언하는 신하는 모조리 극형에 처하겠다고 명하였다. 그러다 보니 장왕의 주위에는 간신들이 들끓었고 목숨을 걸고 간(諫)한 신하들과 충신들은 관직을 그만두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3년 후, 장왕은 그동안 자신과 함께 향락을 즐긴 간신들을 모조리 쳐내고 그에게 간했던 신하들을 등용하여 정사를 보기 시작하였다. 장왕은 간신과 충신을 가려내기 위하여 3년간 속뜻을 깊이 숨겼던 것이다. 그 후 장왕은 초나라를 크게 일으켜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패도정치를 주장한 한비자(韓非子)는 주도(主道) 편에서 ‘군주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하는 잘 보이려고 꾸밀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제 군주시대 한비자의 이러한 이론을 국민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의 지도자에게 곧이곧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같이 일할 사람 중 옥석을 가리는 지도자의 신중함을 강조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심장불로와 상통하는 말로 송나라 소식(蘇軾)의 ‘커다란 지혜를 가진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고 크게 뛰어난 것은 오히려 서툴러 보인다’는 말이 있다. 사마천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의하면 노자가 공자에게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숨겨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덕을 지니고도 겉모습은 어리석게 보이게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군주들에게 유세(遊說)를 다니는 공자를 모욕한 말이라기 보다는 당시 열국의 군주들이 공자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공자에게 그 박학함을 감추어 보이면 더 귀하게 되리라고 충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람의 말은 마음속에 깊이 숨겨둔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흥분하거나 화를 내거나 술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와 구설에 오르거나 큰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또한 마음속에 담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시기심에서 의도적인 뒷담화를 하다가 결국 당사자에게도 알려져 깊은 상처를 주고 관계의 파탄도 불러오는 일을 주위에서 흔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어느 신부님은 다른 사람의 뒷담화만 안 해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보다는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좋은 감정을 숨기기만 하기 보다는 가끔 표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018년 10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머슴과 식모살이를 했던 김영석(91세), 양영애(83세)라는 노부부가 평생 사치를 모르고 과일장사를 하며 근검절약하여 모은 400억의 전 재산을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고려대학에 기증한 이야기가 한국의 신문에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적이 있다.
심장불로라는 말이 원래 권력자인 군주나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속마음이나 가진 것을 깊이 감추어야 한다는 뜻이었다면, 이 노부부는 고귀한 뜻을 가슴 깊이 숨겼다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위해 내놓은 것이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야말로 심장불로보다 한 차원 높은 ‘마음 속에 감추어진 맑은 이슬’, 즉 심장청로(深藏淸露)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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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용 / 메릴랜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