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은 운동성이다.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시간은 흐른다”고 주장한 뉴턴의 시간은 절대성이다. “시간은 우주의 곳곳 마다 다르게 흐를 수 있고,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다” 고 한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상대성이다. “운동의 속도가 빛의 빠르기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지연은 강해지고, 빛의 빠르기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춘다"며 200년 동안 인정된 뉴턴의 물리학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상대성 이론은 난해해서 일단 논외로 하고 아이작 뉴턴의 시간을 살펴보자. 그가 주장한 힘과 운동에 따르면 시간은 우주 어디서든 진행 방식이 같고, 어떤 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항상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절대성이다. 그의 물리학을 철학으로 구현해 보면 뉴턴의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 로 귀결된다. 세상은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일어나는 일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인간 삶의 문제와 직결 된다. 인간은 현재 시간 속에 있고, 과거에서 벗어 날 수도 없고, 오로지 미래만 단지 열려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시간은 어느 쪽으로 이해될까? 눈치채겠지만 답은 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시간속에 멈추어 있다. 종종 정치는 어리석게도 한쪽을 부정함으로써 승리의 깃발을 올리려 한다. 윤 대통령과 행정부는 민주주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 놓았다. 이런 비민주적 회귀는 비위에 거슬리면 확실하게 옭아맬 수 있다는 너무 오랫동안 공정과 정의로 장난을 쳐온 법 기술을 믿기 때문이다.
“돋보이기 위해 학력과 경력을 오기했다”는 김건희 영부인의 변명은 위선과 허세로 덧칠한 말재주에 불과하다. 자기 표현속에 존재하는 진실은 없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전형적인 이중 인격자이다. 이것은 거짓말을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리기 위한 얼버무림이며,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기만행위이다. 끊임없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민 부풀리기, 나타내는 모든 삶의 표시는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데 익숙해진 탓이며, 이 망상과 탐욕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불신과 도덕에 대한 혐오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병적 중독 증상이다.
국민의힘 당은 영부인의 사적인 범죄 혐의를 공당의 힘으로 방어막을 치며, 보기 민망한 낯뜨거운 모습을 거침없이 조연하고 있다. 정당이 어찌 보잘 것 없는 한낱 일에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는가? 의회는 권위와 존엄성이 지켜져야 하는 곳이며 국가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이다. 매디슨은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로 변모할 것을 매우 우려했다. 독일의 법학자 라이프홀츠도 “의회가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로 변모했다”고 같은 애기를 했다.
모든 사건은 필연적으로 증거와 증언으로 결정된다. 경찰과 검찰은 차고 넘치는 증거와 증언에도 애써 외면하며 국민을 속이려 든다. 공직자들의 줄서기 행진이 요란하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전례를 찾기 힘든 가치 혼란과 윤리 전도를 경험하고 있다. 공직자의 공적 윤리는 거의 완전히 붕괴되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조롱거리 수준이다. 조선시대 사육신들은 목숨마저 내놓으며 명분을 지켰다. 불의와 비리, 편법과 탈법으로 찌들어 있을 만큼 그 골이 너무 깊다. 공공성의 처참한 붕괴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어떤가? 정당의 민주적 절차를 무너뜨리며 당 대표를 몰아내고 있다. 매디슨과 라이프홀츠 우려와 비판에서 보듯 무엇보다 대통령이 속한 집권당이 비민주적일 때 권력의 사유화를 초래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대통령은 법무부의 정치화를 묵인하고 법무장관의 독선을 받아들였다.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사정정국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죄가 있다면 누구든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법치이다. 의혹·혐의 만으로 기소하면 야비한 정치 보복 소리를 듣게 된다. 기소와 관련된 처벌은 증거 입증만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절대성을 찾으려 한다. 언어(소통)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성,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성,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성을 데카르트, 어거스틴은 강조했다. 근대 이후 역사가 보여주듯, 분노와 증오에 기초한 처벌은 사람 청산에만 그치고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키지 못하고 후퇴시켰을 뿐이다. 진정한 개혁은 입법과 규칙에 근거한 대화와 타협의 ‘토론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서구는 항상 논리를 가르쳤다. 논리학에는 삼단논법이 포함되어 있지만, 좋은 논증, 좋은 반론, 풍부한 지식도 포함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마누엘 칸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칸트는 “국가형식·지배 형태보다, 통치(governance) 방식과 양식(good morality)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회민주주의의 두 대표 유형 즉 ‘웨스트민스터 모델’이냐 ‘매디슨 모델’이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