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아는 사람이 더 근심이 많다 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더 걱정이 많을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 더 근심이 많다는 말이 궤변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모르고 사는 것이 알고 사는 것보다 더 불편하고 힘들 때가 많다. 몰라서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배워서 알기 때문에 더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은 정보공유가 빠른 세상이기 때문에 아침과 저녁에 들은 소식과 정보가 다르다. 특히 주식이나 암호화폐 같은 것에 투자를 하는 사람은 매시간 매일 달라지는 정보에 의해 가슴을 조리며 긴장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비도 많이 오고 덥기도 했다. 덥고 습기찬 여름을 보내는 동안에는 시원함을 찾을 수 있다면 찾으면서 더운 여름이 아니라 시원한 여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해학이다. 해학은 영어로는 쉽게 유머(HUMOR)라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 해학은 겉으로는 우습고 재미있지만 그 웃음속에 담겨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에 엮어진 현실을 과장하거나 비꼬아서 표현하는 것이기에 쉽게 우스개 소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해학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인 교훈과 책망을 담고 있으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기에 참으로 여유가 있는 것이다. 현대정치에서 영국의 수상 처칠은 해학과 유머가 많은 정치인이었다.
어느 날 처칠이 청중 앞에서 연설을 많은 청중들이 환호를 지르고 있을 때 그 장면을 본 미국의 한 정치인이 쳐칠에게 “총리님은 청중들이 저렇게 많이 모이는 것이 기쁘시겠습니다" 그런데 처칠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기쁘지요, 그러나 내가 교수형을 당한다면 두배는 더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 거라는 생각으로 정치를 합니다."
때로는 웃자고 한 해학과 유머에 대해서 죽자고 따지고 달려드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것은 현학적인 사람들이 그럴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듣고 확인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좋게 보면 진중하고, 차분하고, 이론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지키고 공격적이며 자랑하는 현학적 태도보다는 소학적인 무식함과 모자람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고집과 보복과 집요함 속에 넥타이를 꼭 매는 것보다는 작업복을 갈아 입어야 한다.
삶은 때로는 진지해야하지만 그러나 그 진지함을 더 진지하게 만드는 것은 해학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해학이 없다면 우리 삶은 칼과 피와 주먹이 오고 갈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로 자기의 힘과 지식을 자랑하는 현학의 때가 아니라 서로에게 웃음을 주는 해학해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모두가 힘들어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요즘 여러 곳에서 너무 직선적인 말, 고성의 언어들이 오고 가고 있다. 틀린 것을 고치고, 바로 잡고, 그 누구보다 더 똑똑하고 현학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이 결국 더 자신을 빈곤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현학할수록 사람들은 떠나간다. 하지만 해학할수록 자신도 여유롭게 되고 다른 사람도 즐겁게 만들게 된다.
한번쯤은 직언과 폭언보다는 우회적으로 웃음과 즐거움을 주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해학적인 여유가 현학적인 빈곤보다는 훨씬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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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