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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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과 보신탕

2022-08-17 (수) 이지현 / 베데스다,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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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고기에 대하여 어느 분이 쓴 글을 읽었다. 그 분 글이 과연 사실에 근거를 둔 글일까,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가꾸던 화초도 정이 들면 예쁜 법인데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말 귀도 알아차리는 개들은 그 보다 훨씬 더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정이 들고 나와 친해졌을 때 헤어짐이란 인간으로서 동물이라도 그 정을 떼기가 힘들뿐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영혼과 육신을 가지고 있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할 뿐이다. 또 개란 우리 문화 속에서 집을 지키는 파수병 역할을 하던 그런 동물이다.

그러나 끝내는 함께 하지 못하고 어렵던 시절 무더운 여름 복 더위에 보신탕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눈동자를 맞추고 주인을 보면 반갑다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꼬리를 쳤던 정든 개가 그렇게 가니 어찌 마음이 편했을까.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밥상에 영양식품으로 한 자리를 톡톡히 차지하고 있는 소라는 동물은 어떠했는가.
소는 우리나라 농경시대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요한 동물이었다. 송아지가 자라서 큰 소가 되면 커다란 재산 밑천이요, 농사가 본업이던 많은 농민들한테는 더없는 믿음직한 동업자 같은 농사꾼의 역할을 했다.

봄철 농번기가 시작되면 그 큰 등위에 쟁기를 지워주고 그 쟁기로 밭을 일구어 새 흙을 돋구어주고, 또 논의 흙탕물을 써레질을 곱게 하여 모가 잘 심어지는 일을 도왔다. 모가 잘 심어져야 그 해 쌀 농사 풍작을 기대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화폐의 가치 기준을 쌀 한 가마니로 정해 모든 물가의 기준을 잡았다. 쌀이 우리들 생활 속에서 얼마만큼 중요하다는 개념을 기성세대 분들은 더 잘 아실 것이다.
소는 교통수단으로도 한 몫을 잘했다. 마차가 그것이다.


그뿐이었을까. 나중에는 우리들의 먹을거리가 되어 쇠고기로 변해 설렁탕, 불고기, 육개장 등으로 우리들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농경사회에서 일꾼이던 소도 도살장 앞에서 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고 어느 책에서 본 것을 기억한다.
개도 살아있는 동물이기에 심하게 건드리면 통증을 느껴 괴로워하고 소도 동물이라 이상한 느낌만으로도 눈물을 글썽인다는 말에 무언가 더 애처롭다. 개와 소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개는 덩치가 작아 사람의 손과 무릎에서 지내고 소는 덩치가 크고 힘이 있어 농기구 역할을 할 뿐이다.

대수술 환자와 노약자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옛날에 의사들은 작은 소리로 잡수실 수 있으시면 보양탕을 드시라고 했다 한다. 원기 회복으로는 최고의 약이라고. 소든, 개든, 돼지이든 우리들 밥상 위에 올라 왔을 때 모두가 고기라 칭한다.
보신탕을 요리해 그 그릇을 씻을 땐 그냥 물에만 세척을 해도 잘 씻긴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고기요리는 꼭 세제를 써야 된다고 한다. 그만큼 보신탕은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하다는 설명일 것이다.
오죽하면 의사가 “기회 있으면 드십시오” 했을까. ‘불교와 가톨릭의 음식문화’란 제목으로 쓰신 분의 글을 여기 인용해 본다.

“개고기를 먹는 것을 큰 자랑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의 의식처럼 행동하고 즐겨한다” 하는 표현은 좀 부적절 한 것 같다.
그리고 또 “박해 받던 시절에는 숨어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단백질 섭취를 주위에 있는 개를 잡아 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그 분의 글이다. 박해받던 시절에 그 어두움 속에서 숨어 살던 분들이 어떻게 연기를 피워가며, 냄새를 피워 가며, 개를 잡을 수 있었겠는가.
시간이 많이 흘러 시대의 변천과 기계화된 문명의 현실 속에 우리들은 지금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같은 동물의 육질로 만든 음식, 개의 변신인 보신탕과 소의 변신인 육개장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각자의 생각이 서로 다를 뿐이겠지.

<이지현 / 베데스다,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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