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집 김치냉장고 계기판에 붉은색 불이 들어오면서 “점검”을 하라는 글자가 경고음과 함께 반짝거렸다. 겉은 새것처럼 멀쩡했지만, 그 기계의 속을 알 수 없으니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수리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서 겪은 황당했던 경험 덕분에 김치냉장고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얼굴이나 몸매 관리는 잘하고 있어서인지 외모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함께 가꾸어야 할 인성은 상대적으로 교육이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가정이나 학교에서 인간 교육,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는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성적과 스펙 관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인성교육의 부재는 청소년들의 학교 폭력, 따돌 림 등과 같은 문제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어려운 환경이나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하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0년 청소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중고생 10명 중 3명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슬픔이나 절망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고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8년째 자살이었다는 사실은 자녀를 둔 부모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소식이었다.
이들이 자살 충동에 빠지는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간섭, 통제에 따른 “스트레스와 소통 부재 그리고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또 사단법인 세계 빈곤 퇴치 회가 지난 5월부터 두 달 동안 전국의 가출청소년 423명을 심층 면접한 결과에 따르면 “부모와 소통이 안 되어서”와 “부모와의 갈등, 지나친 간섭, 차별, 가족 간의 소통 부재”가 원인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55.1%나 되었다. 결국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의 응어리가 이들이 가출하게 하거나 세상을 등지게 하는 원인 이 된 셈이다.
청소년들 마음의 창에서는 “점검”해 보라는 붉은 글자가 소리 없이 반짝거리고 있어도 경고음을 듣지 못했다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특성과 변화 에 대해서는 “쟤가 왜 저래?”라고 하거나 “사춘기라서…”라고 얼버무리면서“자랄 땐 다 그런 거야..”라는 처방을 내리고는 “우리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꼰대 수준의 훈계로 상황을 마무리하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부모들이 이야기하는“우리 때”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아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경험하고 있는 “변화”를 이해하고 이를 보듬어 주려는 노력과 역할이 부모나 선생님들은 물론 주변의 어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데 있다.
부모가 자신의 눈높이에서 자녀들의“지금”을 대하다 보니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곤 한다. 한국 청소년상담원의 한 홍보위원은“청소년만”을 대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상담을 하면 1년 이상이 걸리지만 부모님과 상담을 병행하면 3개월 이내에 심리치료를 마친다”고 한 말은 부모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되짚어 보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자녀들의 심리적, 신체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사회교육 기관에서 멋진 “부모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나 새내기 부모 또는 지금 변환기에 있는 자녀를 둔 이들이 “괜찮은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도움이야 말로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하려는 우리의 교육이념(대한민국 교육 기본법 제2조)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자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도 “괜찮은 부모”라면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부모 되기는 쉬워도 부모 노릇 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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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 / 수필가,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