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화 칼럼 (3) “북한 미술, 선전의 도구인가?”
2022-07-27 (수)
문범강 / 조지타운대 교수
김남훈, 강유송, 강윤혁, <자력갱생>(집체화, 부분), 2017, 조선화, 201x403cm, 개인 소장
나는 조선화 강연을 미국, 한국, 일본에서 25차례 이상 해오고 있다. 주로 대학교와 문화센터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지가 10년째 된다. 지난 달 6월3일에는 코로나 방역을 뚫고 일본 교토의 사립 명문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때마다 늘 부딪히는 질문이 “북한의 미술은 체제 선전의 도구가 아닌가?”, “북한에도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 존재하는가?”였다. 도판에 나온 <자력갱생>을 보면서 이 질문에 접근해보자. 지하 터널을 뚫는 대토목공사의 현장이다. 지하수가 천장에서 떨어지고 바닥은 허리춤 위로 물이 차 오르는 험난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동양화 즉 북한의 조선화로 그린 집체작이다. 집체작은 통상 2명 이상의 작가가 협업하여 완성한 작품을 말하고 이런 집단 창작 형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자력갱생>에는 눈으로 셀 수 있는 공사자만도 30명이 훨씬 넘는다. 인물이 대거 등장하는 이런 화면 구성은 기존의 동양화의 전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상이다.
70여년 동안 폐쇄된 환경 속에서 북한의 조선화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사회주의 미술로서 발전해 나가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을 개발해 내었다. 전통적으로 동양화는 인물이 등장할 경우에도 사람이 위주가 아니다. 자연 속에 인물이 아주 작게 그려진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철학의 반영이다.
그러나 조선화는 사람이 우선이고, 가장 강력한 표현의 주체다.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이 지닌 다양한 감정 표현을 실감나게 포착하고 있다. 동양화의 기법은 한 번 검은 색을 잘못 칠하면 다시 수정할 수 없는 치명성을 지니고 있다. 유화에서의 실수는 덧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조선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기법상의 지난함을 극복하고 모든 인물을 입체감 있게 표현한 장르가 조선화다. 어느 국가도 동양화로 이루지 못한 쾌거다.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화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왔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표현 중 유난히 웃음 짓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이렇게 힘든 공사의 현장에서 웃음이 나올 수 있는가? 노동 현장에서의 웃음은 곧바로 체제 선전으로 연결된다.
고난의 작업 속에서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프로파간다 미술이다. 이런 미화의 표현이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주도하는 미술의 핵심 요소이고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외부에서 북한 미술을 진정한 의미의 미술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비판의 관점이 또 다른 인식의 확장을 촉구하고 있다.
모든 비교는 비교 되는 대상을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할 때 비평과 비판은 비로소 정당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 사과와 배는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할 수 없다. 사회주의의 예술을 바라볼 때 자본주의 예술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 자체가 지성적인 접근이 아니다.
두 사회가 동일한 구조가 아니기에 한쪽의 잣대로 다른 쪽의 내용을 판단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두 사회는 같은 구조가 아니라는 인식이 선제되어야 북한의 사회주의 미술의 진정한 면모와 깊이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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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범강 / 조지타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