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아홉 번 다녀왔다. 조선화라는 북한의 동양화를 연구하기 위해 감행한, 6년에 걸친 고된 여정이었다. 단 한 번의 방문이 가져다 주는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무엇에 홀려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행할 수 없었던 과정이었다.
나의 평양 방문은 한국정부나 민간단체 차원에서 주선된 과거 한국인이 다녀왔던 금강산 단체 관광이나, 고려의 궁궐터 복원 프로젝트인 개성 만월대 발굴 조사단, 금강산 신계사 복원 등을 위한 단체 방북과는 차원과 밀도가 달랐다.
이런 단체 방북은 조직된 단체가 하나의 테두리로서의 보호대를 형성하여 참가원의 안전이 보장되고 동료간의 유대감으로 심리적 불안이나 초조감 없이 방북 일정을 마칠 수 있다.
반면, 나의 평양 방문은 혈혈단신이었다. 그 어떤 보호막을 기대할 수 없는 고독하고 늘 불안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방문이었다. 이런 불안감을 안고 아홉 번이나 조선화 연구를 위해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왜? 무엇을 위해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게 되었는가?
나의 직업은 화가다. 미국 대학에서 수십 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다.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다 그러하듯 나 역시 시각 예술가로서 양보할 수 없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자긍심을 지닌 채 미국에서 창작 활동을 해 오던 2010년 어느 날, 워싱턴에서 우연히 동양화 한 점을 마주 대하게 되었다. 이 동양화, 즉 북한의 조선화가 그 이후 나의 삶의 궤적을 180도 바꿔놓게 되었다. 대단히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첫번째가, 김일성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장면을 본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강한 반공교육으로 대학까지 마친 사람으로서 김일성이 등장한 그림을 본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고 거의 반사적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을 봐버린 두려움이 나의 몸을 뒤로 밀치듯 했다.
이 작품을 본 장소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는데도 그런 반응이 몸으로 나타났으니 반공교육의 힘은 대단했다. 두번째의 충격은 그림 자체에서 나왔다. 화가로서 그림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동양화는 이제껏 동양 문화권에서 성장했으며 한국미술, 중국미술을 다 접해 본 지금의 화가인 나의 눈으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이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시적인 환경을 조성하다니. 기존 동양화의 전통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라니! 이 한 점의 그림이 곧바로 나를 잡아 당겨 조선화의 현장으로 내몰아버렸다. 화가로서의 대단한 자존감을 제쳐버리고 미국대학 교수로서의 위상도 벗어버리고 뛰어 들었다.
미친듯이 집중하여 조선화에 몰두했다. 그간의 조선화 연구의 결과를 인정 받아 2016년 워싱턴 DC 아메리칸대학 미술관에서 미국 최초로 가장 큰 조선화전을 유치할 수 있었고, 2018년 광주비엔날레의 본 전시 중 하나로 북한의 조선화전을 기획하게 되어 세계미술계에 조선화의 위용을 선보이게 되었다.
나는 두 국제전의 큐레이터로서 기획, 작품 운송, 설치, 홍보글 작성 등 총괄적인 일을 직접 도맡아 했다. 세계 언론으로부터 대단한 반응이 뒤따랐다. 워싱턴포스트지는 2018.9.19일자 한 면 전체에 광주비엔날레 조선화전을 특집기사로 다뤄주었다.
북한에도 문화가 존재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예술작품이 존재하는가. 궁금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결국엔 코리아반도의 문화유산으로 귀결될 조선화. 도대체 조선화가 무엇이길래 세계 언론에서 특집으로 꾸밀 정도인가. 이념과 체제 속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화의 정체, 앞으로 조선화 칼럼을 통해 진정한 해석과 그 매력을 서서히 풀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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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범강 / 조지타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