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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의‘미국 들여다보기’(43)

2022-06-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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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영어로 말하면서 살기

어떤 사람이 미국 관광 갔다 온 친구를 만나서 물었다. “자네 미국 관광 갔었다면서?” “음. 갔다왔지.” “그런데 자네는 영어 좀 해?” “영어? 아냐, 영어 못 해. 영어는 무슨…” “그래? 그럼 미국에서 고생 좀 했겠는 걸?” “고생은 무슨. 나는 고생 안 했고, 거기 있던 미국 사람들이 고생했지.”
물론 우스개 소리이다. 그렇지만 뼈 있는 우스개 소리이다. 기본적으로 관광객은 돈을 쓰러 간 사람이다. 그러니 관광객이 돈을 쓰게 해야 할 관광지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관광객을 만족시켜 돈을 받아내야 한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미국 상인은 관광객의 영어 실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광객 지갑 속에 있는 돈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관광객이 영어를 잘 하지 못해도 거기에 맞춰서 영업을 하면 된다. 돈을 지불하는 자와 그 돈을 받는 자의 차이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민의 경우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관광의 경우에는 관광객이 갑이 되고 미국 상인이 을이 되겠지만, 이민의 경우에는 미국 고용주가 갑이고 피고용인인 이민자가 을이 된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을 위한 어느 정도의 영어가 이민자에게는 필수적이다. 이민자는 돈을 받아야 하는 자이니까.
70년대 이전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아니 영어를 6년이나 배웠다면서 미국 사람하고 얘기도 못하는 거야? 도대체 뭘 배웠어?”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무척 억울하다. 영어 6년을 배우면 미국 사람하고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 생각 좀 해보자.

일단 70년대 이전은 지금과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때는 국내에서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해외여행? 아주 먼 먼 먼 먼나라 얘기였다. 그 때에는 ‘나, 여권 있어.’라는 말이 자신이 특권층임을 은연 중에 과시하는 수단이 되던 시절이다. 그 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외국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 것이 아니다. 선진 문물를 받아들이기 위해 영문이라는 문자적 수단으로 된 글을 읽고 이해(독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 것이다. 그래서 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입으로 말은 못해도 뭔가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만 하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예를 들어보자. 현관 문 밖에 깔아 두는 도어매트에 YOU HAVE ARRIVED라고 적힌 것이 있다. YOU ARRIVED라고 쓸 수도 있지만 의미가 조금 다르다. YOU ARRIVED라고 하면 도착하다는 뜻의 ARRIVE를 과거형으로 적었으므로 도착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도착한 것이 과거라는 점은 틀림없지만 어제 도착한 것인지, 1주일 전에 도착한 것인지, 1년 전에 도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과거에 도착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그런데 YOU HAVE ARRIVED라고 적게 되면 ‘방금 막 도착했다’는 의미가 된다. 즉 현재완료형, 학교 다닐 때 배운 대로 하면 have + pp의 형식이 되는 바로 그것이다. 현재완료형이므로 단순한 과거형의 문장과는 의미가 사뭇 달라지는 것이다. 70년대 이전에는 그런 것들을 배웠다. 비록 영어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해도 도어매트에 적힌 YOU HAVE ARRIVED의 의미는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발음의 약점은 있다. R과 L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플로리다’라는 단어에서 R이 먼저인지 L이 먼저인지 헷갈린다. 거기에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악센트와 억양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우리 귀에는 뭐 그다지 훌륭한 영어 같게 들리지 않는 베트남이나 중국사람들 말은 알아들으면서 우리가 하는 영어는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 기가 죽는 것도 사실이다.
하루는 수퍼바이저와 업무상 운전하는 자동차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물었다. “미스터 킴, 오늘 어느 차를 운전했어?” “투 톤 트럭(Two Ton Truck).” 그런데 수퍼바이저가 이 세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투 톤 트럭’ 이 세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다.

남의 말은 여전히 어렵다. 허브(herb)라고 알고 있던 것이 ㅎ이 무척이나 약하게 발음되어 거의 어브가 되고, 살몬(salmon)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쌔먼이고, plumbing은 플럼빙이 아니라 플러밍이다. 버지니아(Virginia)라는 발음도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남의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요령은 생기게 되었다. 누가 영어를 하면 초반에 무슨 말을 하는지 바짝 정신을 차리고 듣는다. 영어는 초반에 주어와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초반을 잘 들으면 무슨 얘기인지 대략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제는 날씨가 좋길래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도 좀 사먹으면서 이것 저것 구경하다가 수박 한 통 사왔어.”라고 말을 하기 때문에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그런데 영어는 “I bought a watermelon…”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뒤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하더라도 앞의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음, 수박을 샀다는 얘기구나..’라고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영어 때문에 덜컹이면서 살다 보면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다 살기 매라이레.” 안동지방 말인데 서울말로 바꾸면 ‘(사람은 어떻게든) 다 살기 마련이란다’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믿고 산다. 다 살기 마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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