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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동우 워싱턴 정대위 초대회장을 기리며

2022-06-22 (수) 서옥자 / 한미국가 조찬기도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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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동우 회장님은 올해 89세로 플로리다주 템파에서 거주, 근래 몸이 점점 연로해지고 계시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정작 별세 소식을 듣고나니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지며, 그가 평소 자주 표현하던, “모자 벗고 경의를 표합니다.”로 그리운 마음을 전한다. 그의 열정적인 영혼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가끔 “사람들이 나를 정신대 할머니” 라고 부른다며 웃으시곤 했다. 그만큼 그의 삶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대명사요, 기수를 든 선구자였다.

그녀를 처음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던 때가 1992년 초가을 11월, 벌써 아득한 기억 으로 더듬어 간다. 신학대학 캠퍼스에 파묻혀 공부에만 파묻혀 살던 시절, 우연히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물어 찾아 간 곳이, 맥클린에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와싱톤한인교회(당시 조영진 목사 담임)였다.
이른 저녁 시간,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추진할 계획들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열어 가고 있었다. 앞에서 회의를 이끌어 가고 있던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를, 먼 발치서 감명깊게 보았다. 그 것이 그녀와 먼 발치에서의 첫번째 만남이었다.

그 당시 1991년, 한국에서 김학순 할머님의 용기있는 증언을 시작으로 충격에 쌓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미국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한 첫 모임, 워싱턴 정대위 발족의 현장이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밟혀지고, 잊혀진 역사의 피해자들을 위하여 마음을 합하여 뜻을 세우는, 용기있는 그들의 도전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운명적 만남은 5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로 이어진다. 1997년, 미 국회 의사당, 로툰다(Ratunda Hall)에서 주최한 일본군위안부 사진 전시회,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 행사에서 이 회장님과 처음으로 손을 마주 붙잡으며 연을 맺게 되었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솟구치는 협심을 꽤뚫어 보았다. 그 만남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동지가 되어 수많은 시간을 함께 뛰어 다녔다. 큰 일을 치루면서도 침착하고 대범한, 여장부스러운, 자랑스러운 선배님이다.


그녀는 9년간, 회장으로서의 긴 세월을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미국 정부, 언론계, 그리고 국제 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데 횃불을 든 선구자였다. 경기여고를 거쳐, 1957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66년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와 세계은행에 근무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이 문제에 당신의 삶을 올인하기 위하여 퇴직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문제에 어떻게 해서 동기를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일본군 위안부 시대의 현장에 살았다면, 그것은 나의 스토리가 될 수도 있기에”라며 마음을 쏟아내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비디오로 제작하고, ‘Comfort Women Speak’의 증언집을 출판했다. 또한 미 법무부 특별 수사국장, Eli Rosenbaum과 일본 전범들의 미 입국 저지 법을 발효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2000년도에는 미 연방의사당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초청, ‘존엄과 명예의 여성을 위한 2000년 인권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2001년도, 대한민국 여성주간 행사에서 국민 포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그는 “지난 10년간 정신대 운동을 통해 얻은 진리가 있다면 승리는 포기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을 내비추었다.

워싱턴 정대위 초대회장인 그녀의 횃불을 이어 받았던 나는 함께 일했던 시간들,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한많은 위안부 문제가 어서 속히 해결되기를 기도한다. “이동우 회장님, 그 무겁던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안식하소서. 우리가 이어받은 소명은 계속,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서옥자 / 한미국가 조찬기도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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