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귀가 어두워서 안 들린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젊었을 때는 들을 것만 들어서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잘 들리지도 않고 몰랐는데 세월이 갈수록 보이는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늘어나면서 들리는 소리는 왜 그렇게 잘 들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말도 왜 그렇게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려고 가던 길도 멈추고 만다. 들어서 그냥 흘려보내면 되는데 그것을 또한 되뇌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고자 입이 간지러울 때가 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세상과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소리는 이전보다 더 큰 소리로 들려오고 있다. 이전에는 작은 소리를 내어도 다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더 큰 소리를 내어야 한다. 작은 소리는 누가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더욱 더 입을 크게 열고 높은 소리로 산과 들과 마을을 향해 소리를 친다.
이 소리, 저 소리, 싸우는 소리, 변호하는 소리, 비판하는 소리, 잘난 소리, 호령하는 소리, 명령하는 소리, 비웃는 소리, 호통치는 소리, 정의로운 소리, 자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우리 귀를 울리면 우리의 마음은 누그러지기보다는 흥분하게 된다.
아니 그 소리를 내가 내면서도 모를 때도 있다. 결국 우리는 소리의 소음에 갇혀 사는 것이다.
며칠 전 재판에 불만을 품은 소송인이 상대방의 변호인 사무실을 찾아가 방화를 해서 7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직접 사무실을 찾아가 불을 질러야 하겠다는 그 사람은 얼마나 높은 마음의 소리를 내었을까?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는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같은 하루라도 낮과 밤이 있듯이 내가 잘한 것도 있지만 잘못한 것도 있지 않았겠냐고 생각의 여유가 없었을까? 한 번쯤 높은 소리를 내기보다 낮은 미안한 쏘리(Sorry)의 마음을 왜 못 가졌을까?
성경에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잘못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는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았다.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알고 보면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무시 당하고, 억압 당하고, 매 맞고, 욕먹고, 누명을 쓰고, 해고당하고, 배반 당하고, 파산하고, 실패한 경우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큰 소리, 높은 소리가 들리게 된다. 이곳 저곳에서 높은 소리 큰소리가 나면 날수록 삶은 더 어두워지게 된다.
이제는 높은 소리보다는 낮은 쏘리(Sorry)를 말해야 한다. 사람들의 말 중에서 가장 겸손하고 친근하고 마음을 녹이고 화를 풀고 먼 관계를 가깝게 만드는 가장 따뜻하고 푸근한 말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I am (쏘리)sorry.”이다.
쏘리는 소리를 멈추게 한다. 쏘리는 사람을 풀어주고, 위로를 주고, 화목을 가져다 준다. 이제 우리는 귀에게 휴식을 주어야 한다. 높은 소리에 만연된 우리의 귀에 다른 언어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 언어는 소리가 아니라 “쏘리”이다. 이 말은 모두를 다 감싸고 포함하는 공동체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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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