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소일하기로 하며 첫 번째 손에 잡힌 책이 이광수 대표 문학 선집 중 ‘흙’이란 장편소설이다.
춘원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인 1932년 4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291회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그 당시 농촌계몽, 러시아 어로‘브나로드(군중 속으로)’라는 운동을 동아일보가 몇 년간 주도했을 때 이 소설이 그의 운동 중 일각으로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야기책은 역시 이야기책. 작가의 사상을 전하기 위해선 우선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남녀 간에 사랑, 특히 삼각관계 설정으로 조마조마, 때론 분노와 연민 등을 유발시킴이 필수다. 민족주의자이며 사회지도자 한민교, 이상주의자며 농촌 계몽운동가 허숭, 반대되는 향락 퇴폐주의자인 김갑진, 이건영 등과 자연히 엮여지는 여인들의 사랑으로 인한 눈물과 회한, 배신, 회개의 윤정선, 유순, 심순례 기타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시골 출신으로 윤 참판 댁 가정교사로 있던 허숭의 건실함을 눈여겨 본 윤 참판이 외동아들이 일찍 죽자 하나뿐인 외동딸과 결혼을 시킨다. 이때는 허숭도 고등문관 시험 사법과에 입격, 변호사 자격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현대 같으면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서로 무엇이 좀 통하고 맞아야 성사가 되겠지만 당시는 부모가 정해주면 그만이었다.
시골 학생 허숭도 새벽 기차 편으로 경성(서울)으로 떠날 때 사모의 정으로 배웅하던 순진한 시골 처녀 유순을 훗날 배우자로 생각했음이니 윤 참판의 딸 정선과 허숭의 결합은 애당초 정략결혼의 냄새가 짙은 게 사실이다. 이야기가 대비가 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스탕달의‘‘흑과 적’(黑과 赤)’에서 제재소 집 아들이며 신학생인 주인공이 신분상승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은 전자(허숭)는 피동적, 후자는 능동적이지만 원리는 대동소이하다. 신분상승, 정략결혼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허숭은 결혼 1년 만에 가정을 뛰쳐나와 고향 살여울로 돌아가 농촌 계몽사업을 몇 년 만에 어느 정도 성공을 하나 호사다마라고 그 마을 사채놀이업자 부자의 아들이며 일본물을 잔뜩 먹은 유정근의 방해와 모함으로 그간의 모든 사업이 거품으로 끝나며 하물며 없는 죄를 뒤집어 씌어 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허숭은 오히려 옥살이를 자기성찰과 더 깊은 지식함양의 기회로 삼는다. 한편 정선은 남편의 친구이나 탕아인 동네 어릴 적 아는 김갑진과 블륜의 씨앗을 가진 가책으로, 남편 허숭은 모든 걸 용서했음에도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다.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 하나 얼마 후 곧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선 비관과 죄책으로 비참한 신세로 얼마를 보내게 된다.
너그러운(실제 속은 얼마나 썩었으련만, 적어도 겉으론) 남편의 헌신적 간호와 위로에 마침내 감읍하여 함께 시골마을 살여울로가 억척스런 시골 아낙네로 변신해 남편 옥살이 동안 대단하게 혼자 시골집 대소사를 진두지휘 한다. 한편 남편을 무고, 모함해 옥살이를 하게 한 장본인 유정근은 처음에는 의협심 강한 마을 청년(그도 모함으로 옥살이 했음)의 죽이겠다는 말에 수동적이었지만 종국에는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거의 전 재산을 마을을 위해 내놓겠다고 마을 주민 앞에서 말하고 또한 훗날 허숭을 적극 돕겠다고 했다.
민족주의자 한민교 선생도 살여울로 와 농촌사업에 합류하며 더욱이 망나니 김갑진도 ‘검불랑’이라는 깡촌에 들어가 회개하고 개간사업을 한다는 필자 춘원의 말을 빌릴 것 같으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이 소설의 후속편을 기대하시라고 독자들에게 말하며 대미를 장식한다.
세상은 땅(흙)과 물과 공기로 되어 있으며 인간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양식은 흙에서 나온다는 ‘흙’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는 소설이 아닌가한다. 다시 말해 요새 문명이 어떻고 4차 산업혁명이 어떻고 5차가 도래하느니, 일론 머스크가 무인 전기차가 어떠니 떠들고 흙과는 전혀 무관한 세계의 대거간꾼 아마존의 베이조스 등이 설치는 세상이라지만 어머니 같은 포근한 땅, ‘흙’은 그래도 그중 우뚝 솟은 으뜸이 아닐까?
농촌을 경시하는 풍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있으나 이런 풍조는 애초에 생겨나지 않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보라, 비옥한 땅 농경지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밀가루, 옥수수 등 농산물 가격들이 천정부지로 뛰고 특히 빈민국들은 이런 와중에 크게 고통 받고 있음을 보고도 ‘흙’을 경시할 것인가!
시대가 거의 백년의 차이가 있으나 인간사 돌아가는 원리나 모습은 그래도 비슷함을 느끼게 하는 소설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춘원의 생애에 옥의 티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편 문학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누가 뭐라고 하던 춘원의 묘사력은 한국의 셰익스피어가 아닐까 한다.
어느 한 대목을 소개하면, 보통의 경우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두둥실 일고” 할 것을,“하늘은 일고 나는 구름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라고 하든지, “온갖 일어나는 상념을 머리에 맡긴다”는 표현은 춘원의 글의 매력을 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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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 / 의사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