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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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청송 약수터

2022-06-08 (수)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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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로 접어들자 무덥고 습한 열기가 벌써 뜨거운 여름을 예고한다. 무성한 나무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 있으니 마치 초록색으로 도배를 한 듯 녹음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들 내외한테서 카톡으로 문자가 왔다. 오월 가정의 달을 보내며 며칠간의 연휴 동안 아이들과 함께 오션시티 해변으로 나들이 가자는 것이다. 반갑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싫어지기 시작하고, 끈적한 땀을 주체 못하니 해변의 시원한 바닷가가 잠시 즐거움은 줄 망정 뒤에 오는 번거로움이 귀찮아 사양을 했다. 젊은 너희들이나 추억 쌓고 즐기다 오라고.

숨 막히는 폭염이 시작되는 여름이면 어릴 적 추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일찍 홀로 되신 할머니가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자며느리까지 오롯이 3대가 한 지붕 아래 90평생을 사셨으니, 요즈음 같은 세상에는 복 받은 어른이셨다. 공장일이 뜸한 한여름이 되면, 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청송으로 휴가를 떠났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할머니는 소풍가는 어린아이가 되어 흰머리 곱게 빗으시고, 주체 못할 한복의 긴치마는 아예 허리끈으로 질끈 동여 매고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와 식구들을 기다리신다. 경북 청송은 철분이 풍부한 약수와 닭백숙으로 유명하고, 근처의 주왕산은 산수가 수려하여 산 주변을 등산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엄마의 손맛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 밑반찬과 팥을 넣은 찰진 찰밥을 찬합 도시락에 층층이 넣고, 더불어 준비한 수박과 참외를 보따리와 가방에 넣어 하나씩 분담해 들고 버스에 올라타면 무더위는 아랑곳없이 나들이 가는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시골 산골짜기에 도착하면 유명세를 타서인지 넓은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전국에서 온 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오가고 있다.
서둘러 여관을 잡고 보따리를 풀기가 바쁘게 약수터 앞에서 긴 줄로 물통을 두 손에 들고 서 있는 사람들 뒤로 뛰어가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다리는 동안 갈증을 달랠 겸 플라스틱 바가지에 약수를 받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차고 떫은 사이다처럼 코끝을 콕 쏘는 그 맛이란,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한 모금 더 들이키게 된다.


중천에 떠 있는 뜨거운 햇살에 잔뜩 달구어진 편편한 바위 위에 식구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에 잘 익은 수박과 참외를 담그고, 미리 준비한 찰진 찰밥과 밑반찬으로 버스에서 시달린 빈속을 채우며, 오손도손 엄마의 정성과 함께 먹었던 늦은 점심, 그 뒤에 후식으로 쪼개어 먹었던 수박과 참외의 단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2박3일의 여관에서의 식사는 갖은 산나물에 약수를 넣어 끓인 닭백숙이 철분 탓인지 색깔이 파래 순간 놀랍긴 해도, 푹 삶은 닭고기는 육질이 연하고 부드럽고 특히 보양식으로 과식을 해도 속은 늘 편했던 것 같다.

언젠가 주왕산 관광지 소개로 약수터 주변 사진을 보니 반세기 전의 모습과는 달리 인공적인 시설이 가미되어 삭막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아담한 시골 풍경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는데….
특히 새벽 일찍 일어나 산속의 오솔길을 걷노라면 풍겨오는 신선한 풀 내음과 맑은 공기가 어찌 그리도 달디 달았을고! 지금은 기억마저 희미해진 그때 그 시절이 언제 다시 나에게 돌아올까 생각하면 애잔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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