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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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2022-06-01 (수) 정성모 / 워싱턴산악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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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4분의 4박자 블루스곡인 ‘봄날은 간다’ 노랫말은 한 편의 시(詩)와 같고 대중들 인기가 높은 노래이다. 하늘나라로 떠난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하고 애절하게 노래했다.
겨울을 밀어내고 어느 날부턴가 훈풍과 함께 찾아와 꽃으로 산야를 물들이면서 생명을 새로 키워내던 봄은 금세 가버린다. 봄은 언제나 짧고, 덧없고, 하염없다. 봄은 기적같이 왔다가 거짓말처럼 가버린다.

봄은 오지 말라 해도 오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천지의 기운이다. 봄은 마중도 필요 없고 배웅도 필요 없다. 나의 봄날은 나의 색깔로만 나타나는 봄이다. 서로 색깔이 다른 ‘봄날은 간다’와 함께 지난 봄을 보내고 오는 여름을 맞는다.
불후의 명곡 ‘‘봄날은 간다’ 옛노래는 노래 깨나 부른다는 한국 가수치고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가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대중가요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긴 노래다. 데뷔곡으로 노래를 부른 백설희도, 노래를 작곡한 박시춘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 울리는 노랫말을 쓴 작사자 손로원은 덜 알려져 있다.

손로원씨는 서울에서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고 철원에서 자랐다. 인생 후반기는 거의 부산에서 보냈다. 용두산 공원 근처 판잣집 단칸방에 살면서 1년 내내 검정 고무신에 검정 점퍼를 입고 다녔다. 막걸리를 즐겨 마셔서 ‘막걸리 대장’이란 별명도 붙었다. 그 와중에 많은 노래 가사를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어 가는 무렵 ‘방랑벽’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것을 보는 어머니는 자식이 정착해서 결혼하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강원도 철원에서 홀로 농사짓던 손로원의 어머니는 자신이 결혼식 날 입었던 연분홍 치마와 저고리를 아들의 결혼식 때 입고 싶다는 말씀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손로원씨의 어머니는 1945년 쯤에 돌아가셨다. 손로원씨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가 있었다. 그 시절인 1953년 11월 피난민 판자촌 대화재 때 판잣집 단칸방에 고이 간직한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의 사진마저 불에 타버린다. 참담한 심정으로 부산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철원으로 돌아와 불효를 자책하면서 차가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손로원은 고향에서 봄 속을 걸어오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봄날은 간다’는 가사를 썼다고 한다.

가사의 내용을 확대 해석하면, 우리 민족의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가족간의 이별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손로원씨의 입장에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본인의 결혼과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곁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의 후회가 담긴 가사로 보여진다. ‘봄날은 간다’는 것은 때 늦은 후회를 해 봐야 봄날이 지나가면 끝이라는 말처럼 소용 없음을 이야기 하는듯 하다.

이역 만리 떨어진 미국에 이민와 살면서 노년에 접어든 우리 동포들에게 ‘봄날은 간다’가 주는 느낌은 각별할 것 같다. 여우는 죽을 때가 되면 제가 살던 굴 있는 언덕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뜻으로 수구초심(首丘初心) 또는 호사수구(狐死首丘)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 하고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귀소본능(歸巢本能, homing instinct)이다. 인간이나 동물의 생태적 성질이다.

간들간들한 연분홍 치마 곡조에 봄날도 가고, 새파란 풀잎도 세월 따라 흘러간다.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봄과 함께 이 노래도 흘러가지만 내년 이맘 때면 연분홍 치마의 ‘봄날은 간다’는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손로원씨 어머니의 연분홍 치마는 우리들 방안의 벽에 영원히 걸려 있을 것이다. 몇 번 더 ‘봄날은 간다’를 불러야 인생이 끝날련지? 인간과 봄의 줄다리기는 매년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더 머물다 가라, 더 빨리 가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생처럼 봄이 겨울로 뒷걸음질 하는 일은 없고 머물다 가게 되어 있다.
식물이 잘 자라고 여름 기분이 들기 시작하는 소만(小滿)도 지났다. 벼·보리 등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리기 적당한 시기인 망종(芒種)이 눈앞에 다가왔다. 봄이 졸업하고 초여름 더위가 곁에 와 있다. 꽃이 필 때 설레는 마음을 준 봄날은 가지만 봄은 제 할 일을 다했을 뿐이다. 까치가 지저귀고 개가 짖어대도 기차는 가듯이 연분홍 치마 휘날리면서 봄날은 간다. 우리 인생의 봄날도 흘러간다.

<정성모 / 워싱턴산악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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